대학교수를 꿈구던 청년…재계 '일본통'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경련 회장 자리를 조석래(73) 효성 회장이 꿰찼다. 조회장은 한때 대학교수를 꿈구던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창업주인 조홍제 선대 회장의 부름을 받고 기업인으로 변신한 것은 1966년 2월의 일이다.


경기고와 일본 와세다대를 거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 공대에서 화공학 석사를 받은 다음 박사를 준비하던 때였다. 그러니 결국 효성물산 관리부장으로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40년만에 재계의 상징적인 '수장' 또는 '얼굴' 격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게 된 셈이다.


조회장의 경영 참여는 남달리 속도가 빨랐다. 입사한 해 11월 동양나이론 건설본부장을 맡아 울산공장 건설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1973년 동양폴리에스터, 1975년 효성중공업을 설립하면서 효성을 국제적인 규모의 회사로 키웠다. 당시 효성은 자산 기준 재계 10위권에 포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후 주력인 섬유ㆍ의류산업 쇠퇴 등으로 효성은 사세가 약화돼 지금은 중견그룹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이것이 조회장의 전경련 회장 추대에 결정적인 걸림돌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1981년부터 줄곧 회장으로 효성을 이끌어온 그는 무엇보다 재계의 대표적인 학구파다. 경제ㆍ경영서적 다독으로 유명할뿐 아니라 유학 경험에 힘입어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편이다. 특히 일어는 국어처럼 구사하는 수준이고 그 때문에 일본 정ㆍ재계 인사들과의 교류 폭도 깊어 '일본통'으로 통한다.


이러한 언어능력에 포개진 왕성한 대외활동 의욕으로 미뤄 볼 때 그의 다양한 대외 직함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1987년 전경련 부회장을 맡은 이래 한중경제협회 부회장·한미재계회의 한국위원장·한일경제협회 회장·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이사장·태평양경제협의회(PBEC) 국제명예회장 등으로 활동중이다.


그가 다른 그룹 오너들에 비해 내심 전경련 회장 타이틀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관측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조회장은 자신이 오너 보다는 전문경영인으로 인식되기를 희망하면서 사장단과 격의없는 마라톤 토론도 마다하지 않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전문 수행비서도 없고 비서실장도 두지않은 채 필요에 따라 관련 실무자들과 출장길에 오르는 등 탈(脫)권위형에 가깝다. 꼭 이때문만은 아니지만 중량감이나 후덕함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비즈니스 태도와 무관치는 않아 보인다.


독서와 더불어 클래식 감상, 골프(80-90타대)도 즐긴다는 그는 부인 송광자 씨와 사이에 3남을 두고 있다. 현준, 현문, 현상 씨 등 삼형제는 올해 모두 한계단씩 승진, 창업3세 경영에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조회장은 요즘 "글로벌 기업으로서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격이 아닌 품질로 승부해야 한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품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각별히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어수선한' 전경련의 항로를 잡고 품질을 높이는 것도 이제 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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