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보급량 1327개소·4534MWh 일부사업장 계통서 분리
사람 몰리는 공항, 마트, 호텔, 병원 등에도 278MWh 설치
"사상자 발생해야 정신 차리나, 산업부 남의 일처럼 뒷짐"

▲삼척시 근덕면 한 태양광발전소에 설치된 ESS가 화재로 불타고 있다. 이 설비는 정부 주도 긴급 안전점검을 받고도 화재를 피하지 못했다. ⓒ사진-삼척소방서
▲삼척시 근덕면 한 태양광발전소에 설치된 ESS가 불타고 있다. 이 설비는 정부 주도 긴급 안전점검을 받고도 화재를 피하지 못했다. ⓒ사진-삼척소방서

[이투뉴스] 최근 서울 강북구 소재 A백화점은 지하 5층에 설치한 800kWh(배터리 기준) ESS(에너지저장장치)를 아예 계통에서 분리했다. 전력피크 때 충전전력을 방전시켜 전기요금을 절약할 요량으로 무려 7억원 가까이 들여 구비한 설비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ESS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관리자가 결단을 내렸다. 설비를 못 돌려 손해를 보더라도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실태 파악 차 현장을 둘러봤다는 한 전문가는 “(직원들이)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 하더라. 국민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정부가 원인파악이 안된다는 핑계로 넋 놓고 있다. 안일하고 무책임한 모습은 BMW 화재 때나 지금이나 판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잇따른 ESS 화재에 대한 산업통상자원부의 미온적 대처를 놓고 원성이 적지 않다. ESS를 신산업으로 지정해 각종 보급정책에 펴더니, 정작 국민안전을 위협하는 원인불명 화재가 끊이지 않는데도 한 발짝 물러나 딴전을 피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17일 정부는 충북 제천 한 시멘트공장에서 16번째 화재가 나자 ‘긴급 대응조치’라며 안전진단 미수검 설비 가동중단을 권고했다. 그런데 80여개 시설에 직접 가동중단을 요청한 측은 배터리 납품회사인 LG화학. ESS 연쇄 화재를 대하는 정부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급기야 지난 24일 이미 점검을 완료한 삼척 태양광 ESS에서 추가 화재가 났지만, 정부차원의 공식대응은 아직 없다.

발전사 담당자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화재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겠다는건가. 남의 일처럼 뒷짐 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면서 “지금까지는 옥외(屋外) 시설이라 운이 좋게 재산피해로 끝났다. 같은 화재가 사람이 많이 몰리는 빌딩 안에서 난다면 어떻겠는가”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투뉴스>가 입수한 전국 ESS설비 현황자료에 따르면, 지난 10월말 현재 국내에 누적 설치된 ESS는 배터리용량 기준 4534MWh, PCS(전력변환장치) 용량기준 1568MW이다. ESS설비를 설치한 재생에너지 발전소나 사업장, 건물 수로는 1327곳에 달한다. 전체 설비량은 1000MW 원전 4.5기가 1시간 동안 생산한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정도다.  

이중 2017년 8월 첫 공식집계 이후 현재까지 모두 17개 ESS에서 화재가 났다. 배터리 78MWh, 265억원 어치가 폭발을 일으키며 불에 탔다. 그나마 인명피해가 없던 것은 천만다행.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하게 원인이 규명된 사고는 없다. 올해 5월 불이 난 한전 경산변전소 FR(주파수조정용)용 정도가 배터리 제어시스템 결함으로 잠정 결론났을 뿐이다. 나머지 16건은 배터리 제조사와 소방당국,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전기안전공사 등의 합동조사로도 오리무중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ESS설비가 무작정 추가 설치되고 있고, 기존 설비 상당수가 다중이용시설에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본지가 전체 ESS 가운데 다중이용시설에 설치된 설비를 따로 추렸더니, 그 용량이 278MWh(배터리 기준, 307개소)에 달했다. 

설치장소도 시청, 공항, 대형마트, 복합쇼핑몰, 호텔, 대학교, 전철역, 대학병원 등 유동인구가 많은 건물이 대부분이고, 연구소나 군(軍)시설, 한전 전국지사 등 특수시설도 다수 포함됐다. 이들시설 대부분은 태양광·풍력 연계용과 마찬가지로 삼성SDI와 LG화학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존 화재가 태양광·풍력·공장에서 발생했다고 안심할 처지도 못된다. 지난 9월 14일 한전 제주본부에서 발생한 화재는 건물 옥내서 발화했다. 한때 폭염에 따른 배터리실 온도상승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최근 겨울철에도 빈발하는 화재는 그런 가설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민관합동 안전진단 외에 사실상 뒷짐을 지고 있다. 업계에 의하면, 2020년부터 ESS에 적용되는 REC 가중치가 4.5에서 4.0으로 하향 조정돼 내년에도 ESS 설치수요가 대거 몰릴 전망이다. 한쪽에선 원인도 모르는 화재로 설비가 불에 타는데 다른쪽에선 새 ESS가 설치되고 있다. 

정부는 현재 화재예방시스템 설치 자금을 보조한다며 업계로부터 융자신청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형적인 사후약방문 정책으로 실효성 있는 예방대책이 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재생에너지 시스템 전문가는 "BMW 화재가 터질 때도 정부는 업체 말만 믿고 허송세월을 보내다 리콜차량에도 불이 났고, 결국 설계·제품결함으로 결론내려 과징금을 부과했다. ESS도 거의 같은 패턴이 될 것"이라며 "일단 배터리 공급사가 제조물 책임차원에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지도록 해야한다. 배터리 회사들이 스스로 문제가 없음을 입증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십수년전 제주도 스마트그리드 실증사업부터 수천억원 규모 한전 FR사업까지 그많은 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정부나 기업 누구도 고민하지 않고 신산업 몰이에만 나선 것"이라며 "기술검증없이 공명심에 ESS보급을 밀어부친 정부나 불완전 제품을 시장에 공급하고도 막대한 수익을 올린 기업체나 모두 책임이 무겁다"고 지적했다.

설비보급에 앞서 운영관리 시스템부터 갖췄어야 했다는 지적도 있다. ESS 전문기업 한 임원은 "한국은 하드웨어만 중요 시 하다보니 운용관리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제어되지 않는 에너지는 위험 그 자체"라면서 "EPC단계부터 데이터방식 등을 통일시켜 제대로 현장데이터가 시스템에 취합될 수 있도록 하고, PMS(Power Management System)로 전체를 실시간 통합관리해야 한다. 그런 기본만 잘 챙겼어도 ESS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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