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그리드, 과거 10년과 미래 10년의 성찰
"기술이 제도의 장벽을 뛰어넘을 때 큰 진보"

▲경제학 박사. 산업부 파견근무(~2010), 전력거래소 국제협력팀장, 現 대외협력실장
▲경제학 박사. 산업부 파견근무(~2010), 전력거래소 국제협력팀장, 現 대외협력실장

[이투뉴스/채영진] 그린뉴딜이 세계 에너지 업계를 달구던 지난 6월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코로나19 이후 경제회복 수단 가운데 하나로 “지속가능 회복 계획(Sustainable Recovery Plan, SRP)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에너지 관련 재정투자를 계획하고 실행할 때 각국 정부가 참조할 수 있는 일종의 모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는데, 필자의 관심을 끈 부분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세계 각국의 경제회복 패키지에 대한 비판이었다. 골자는 2008년 이후 긴급 경제 회복 프로그램을 통해 글로벌 경제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회복되기는 했으나 그 부작용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심각하게 증가했다는 부분이다. IEA는 그에 대한 반성으로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패키지를 설계할 때 2008년과 같은 결과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이 최소화 되도록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경제 회복을 핑계로 전통 굴뚝산업이나 화석연료 발전원을 지원하지 말고, 경제위기로 유가가 하락한 시점에 에너지가격체계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리먼 브라더스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경제 위기로 2008년 이후 에너지업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때도 세계 각국은 경제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내놓았고, 전력산업계의 경우 ‘스마트그리드(Smart Grid)’를 대안으로 내놨다. 물론 스마트그리드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평상 시 낡은 전력인프라가 국제 경쟁력을 해치고 재생에너지 확산을 저해한다고 판단해 왔던 미국과 유럽연합에서 각자 추진하던 전력시스템 개선 계획이 경제위기를 만나 스마트그리드란 용어로 통일되었다.

2008년부터 미국 오바마 정부와 유럽연합은 스마트그리드란 화두를 배경으로 막대한 재정을 투자했고, 새로운 성장동력에 목말라하던 우리나라도 녹색성장이란 깃발 아래 그 행렬에 동참했다. 소규모 개방형 수출 경제인 우리나라 특성상 자연스럽게 외부 기술적 격변에 휘말리게 됐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이 있었다. 주로 전력망 개선에 치중하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가 커지고 글로벌 경쟁에 심각하게 노출되면서 과거에 성공적이었던 ‘패스트 팔로우’ 전략 대신 ‘퍼스트 무버’ 전략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마트그리드는 전력망에 정보통신기술(ICT)을 결합해 이종 산업간 융복합을 모색하는 것으로 확장되었고, 이러한 접근방식은 많은 국가의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관심은 지대했다. 흥미로운 점은 후쿠시마 사태와 그 여파로 구체제의 수호자격인 동경전력의 해체를 경험한 일본에서 오히려 10년 전 우리가 처음으로 상상했던 산업간 융복합을 서서히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에너지업계의 제도적 안정성과 경쟁력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스마트그리드 사업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규 진입 기업에게 너무나 큰 장벽으로 여겨지는 포지티브 규제 시스템에서 수요자원시장, ESS, 전기차 충전 서비스, 이제 곧 본격화 될 소규모 분산전원 중개시장 등은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오랜 인고의 시간과 함께 관련 업계 종사자와 정부 및 관련 기관 실무자들의 피와 땀이 어린 결과물이다. 사실상 기득권의 동의 내지는 묵인이 없으면 새 사업을 시작하기 힘든 보수적 전력업계에서 의미있는 성과다. 또 하나의 성과는 바로 의사결정 과정의 다원화다.

스마트그리드 이전 전력업계 의사결정은 대부분 소수 전문가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이뤄졌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상명하복식 통제와 관리를 선호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종 산업간 융복합을 앞세운 스마트그리드가 본격화되면서 업계의 이러한 관행은 크게 개선됐다. 성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력사업 모델이다. 120년 전 토마스 에디슨의 비서였던 사뮤엘 인설이 고안한 투자보수율 규제는 백여 년이 넘도록 여전히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규제의 핵심은 정부가 전력회사의 합리적 비용과 투자비를 언제나 보전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전력판매단가(전기요금)를 규제하는 방식이다. 원전, 석탄, 가스, 석유 등 전통적인 전원만 있었다면, 문제없이 이 시스템이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큰 문제는 사업자 매출이 줄어드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매출감소가 자연스럽게 판매단가 인상으로 연결돼 정치적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에너지효율화 사업의 가장 큰 반대자는 전력회사였다. 사회적으로 에너지절약이 바람직한데도 전력회사가 매우 수동적이라 여러 방안들이 고안되고 시행됐다. 대표적인 것이 에너지효율화 사업을 매출 혹은 비용으로 인정해 주거나 법으로 강제하는 것, 또는 별도 재원으로 해당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판매사 수입을 위협하는 재생에너지 발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에너지효율 사업은 규모가 크지 않아 기존 투자보수율 규제에서 수용될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재생에너지는 얘기가 다르다. 예를 들어 재생에너지 발전으로 인해 전력회사 판매량이 줄면 자연스럽게 수입도 준다. 누군가 수입을 보조해주지 않으면 동일한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판매단가를 올려야 하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된다. 한편 전력시장에 한계비용이 ‘0’인 발전기 수가 증가하면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맞춰줄 첨두발전기와 기저 발전기의 수익구조가 악화될 가능성이 높고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발전기 투자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재생에너지 발전기는 계속 증가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발전기가 확보가 과거보다 어려워지고 있다. 물론 전력시장 제도개선을 통한 도매시장 가격체계 개선, VPP(가상발전소)나 수요자원시장 확대, 재생에너지 예측정확도 향상, 불확실성 관리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근원적 문제가 남는다. 이는 전 세계 전력회사들도 고민하는 주제다. 다만 선진국에 비해 경직적인 요금체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보다 유연한 가격제도가 필요하다.

또다른 과제는 전기차와 이종 산업간 융복합이다. 포지티브 규제 방식 때문에 산업간 융복합이 어려운 점을 인정하더라도 전기차의 더딘 확산은 아쉽다. 물론 전기차 충전 인프라는 초기 투자비용이 막대한 반면 편익은 서서히 실현되고, 비용 부담자와 수혜자가 서비스 이용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대표적 인프라 구축 사업이다. 하지만 국내 전기차 기술 수준에 비해 충전망 확대가 더딘 것은 분명 개선의 여지가 크다. 에너지 활용 측면에서 전기차의 가장 이상적인 사업모델은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으로 전기차를 충전하는 형태다. 잉여전력으로 초래되는 전력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때 충전요금은 매우 낮거나 심지어 무료, 더 나아가 전기차 소유주가 특정 시간에 충전을 하는 대가를 받을 수도 있다. 수요자원시장의 정반대 개념이다. 어떤 이유로 발전기의 출력을 줄이는 것보다 누군가 그 전기를 쓰는 것이 전력망 전체에 더 이득이라면, 전기를 쓰는 것에 대한 합리적인 대가를 받을 수도 있어야 한다.

이종 산업간 융복합 이슈는 2010년만 하더라도 다소 뜬구름 잡는 수사에 그친 면이 없지 않지만 오늘날은 그 사이 발생한 주요사건들로 보다 강력한 경제적·기술적 의미를 갖게 됐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인류 인식을 바꿔놓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알파고를 필두로 한 인공지능의 상용화, 셰일가스 본격적 확산, 재생에너지 발전량의 급속한 증가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5G,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빅데이터가 뒷받침하는 인공지능 확산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 변화를 이끌어 냈다. 오일 피크에 직면했다고 판단하는 글로벌 석유메이저와 내연기관 산업, 통신회사 등이 전력산업에 본격적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수소경제 논의가 본격화 됐으나 그 본질인 융복합 이슈가 해결되지 않으면 막연한 희망에 그칠 공산이 크다. 스마트시티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여년을 돌이켜 보면, 가장 좌절이 컸던 순간은 기술이 제도의 장벽을 넘지 못했을 때다. 반대로 가장 큰 환희는 기술이 제도의 장벽을 뛰어 넘을 때 우리에게 다가왔다. 중요한 것은 제도와 규칙의 예측 가능성이다. 큰 틀에서만이라도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앞으로 기술이 제도를 뛰어넘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채영진 박사 mahatma@kpx.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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