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전력시장 설계, 올해는 기후·산불이 원인
현상 이면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 대안 모색해야

[이투뉴스/채영진] 올여름 캘리포니아 순환정전 사태를 놓고 갑론을박이 뜨겁다. 지난 8월 당시 상황은 이렇다. 비정상적 폭염과 코로나 19로 주택용 전력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피크시간에 가스발전기가 고장을 일으켰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캘리포니아는 오후 6~8시가 전력피크 시간대다. 하지만 북서부 및 남동부와 연결된 전력망에서 조달 가능한 융통전력도 부족했다. 별수 없이 당국은 두 차례 순환정전을 시행했다. 이후 유사한 위기도 절전과 냉방온도조절로 넘겼다. 9월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달 6일 브루스 워커 미국 에너지부 차관은 캘리포니아 전력거래소에 해당하는 CAISO(California Independent System Operator)의 긴급요구를 받아들여 대기규제에 걸려 있던 가스발전소 3곳의 출력제한을 일주일간 해제하는 연방전력법(Federal Power Act) 제202조(c) 긴급명령을 승인했다. 이렇게 확보한 추가예비력은 100MW. 49GW(9월 6일 최대수요 기준)규모인 캘리포니아 전력시스템에서 100MW가 아쉬워 연방정부 권한을 빌어 설비 긴급확충에 나선 것이다. 2000년 이후 미국 전역에서 이런 긴급명령이 발동된 사례는 8회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캘리포니아는 아직 대규모 산불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과거에도 산불로 일부 지역 정전이 유발된 적은 있었지만, 최근 양상은 딴판이다. 산불에 의한 송전용량 손실과 외부로부터의 전력조달 어려움까지 3중고다. 특히 산불이 크게 번지고 있는 오리건주로부터 가져오는 전력이 900MW 가까이 줄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북서부 지역 수력발전소와 남동부 애리조나주 화력발전소로부터 평균 전체 전력의 4분의 1을 조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지역도 이상고온으로 전력사정이 넉넉하지 않다. 캘리포니아주 공공서비스규제위원회(CPUC)와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CEC)는 주지사에게 보낸 합동 서한에서 이번 전력대란 원인을 전력수요 증가와 예상치 못한 공급손실, 서부지역 이상고온으로 인한 외부전력 조달 난항 등으로 꼽았다. 아울러 태양광이 감소하는 늦은 오후나 저녁시간에 필요한 전력을 외부서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서부지역 전력회사들이 자기지역 공급을 우선 시 하다보니 위기 시 CAISO 공급량 제한은 불가피하다. 공급량 일부가 CAISO 에너지시장에 입찰을 하고 있지만, 장기계약으로 묶여있지 않다보니 공급의무까지 지는 상황도 아니다.

▲캘리포니아 산불발생 현황 (9월 13일 기준)
▲캘리포니아 산불발생 현황 (9월 13일 기준)

이번 사태 원인을 놓고 현지서도 공방이 한창이다. 짐 피터슨 공화당 에너지위원회 부의장은 “캘리포니아 주정부 재생에너지 정책으로 가스발전 의존도가 줄면서 전력부족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에너지수요에 대처할 수 없는 민주당이 국민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힐난했다. 언론도 거들었다. <AP통신>은 재생에너지가 오염을 줄이지만 바람이 잦아들거나 해가 진 뒤 전기수요가 급증하면 전력이 부족할 수 있어 주 정부가 2025년말 가동을 중단하는 디아블로캐넌 원전의 수명 연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재생에너지 확대를 지지하는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에너지정책 전환기에 정책 신뢰를 훼손할 수 없고, 더욱 적극적으로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겠다고 공언했다. 향후 대안으론 ESS(에너지저장장치) 확충을 제시했다. IT 매체인 <기즈모도>도 캘리포니아 정전 원인이 재생에너지는 아니라며, 정전 당시 태양광은 일정했으나 LNG발전량이 부족했고 이는 공급관리의 문제라고 두둔했다. 시민단체인 ‘더 나은 환경위원회’는 정전을 촉발한 폭염은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기후변화가 원인이므로, 재생에너지를 더 늘려야 한다고 역공을 펴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19년 전 캘리포니아 전력위기 사태 당시 오판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사태는 전 세계 전력산업계의 논쟁거리였다. 전력자유화 바람이 전 세계를 휩쓸던 시기, 규제 완화의 선봉에 섰던 캘리포니아의 몰락이 주는 충격은 컸다. 전력자유화 바람에 찬물을 잔뜩 끼얹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도 ‘민영화가 캘리포니아 전력위기의 원인’이라는 지록위마식 프레임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결과적으로 배전분할이 중단됐다. 전력위기라는 사실에 매몰돼 민영화를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주장에 묵시적 동의, 내지는 침묵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제는 그런 현상 이면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때다.

2000~2001년까지 캘리포니아 전력수급 상황은 백척간두 신세였다. 수급비상 1, 2단계가 2000년 91회, 2001년 1~5월 127회 발령됐고 우리로 치면 ‘심각단계’에 해당하는 3단계도 2001년 1~5월에만 38회나 발생했다.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의 괴리로 인한 전력회사 재정 악화가 주원인이다. 전력산업 구조개편 이후 4년간(1998~2002년) 도매가격은 경쟁시장에 따라 결정하고 소매가격은 동결하기로 결정했는데, 2000년 6월에는 도매가격이 전년대비 평균 2.7배, 그해 12월에는 11배나 급등했다. 하지만 주정부가 소매가 상한선을 정하면서 전력회사 재정악화가 심화됐고 전력구매에 차질이 생겼다. 여기에 연방정부와 주정부간 갈등으로 전력회사 장기계약이 어려워지면서 가격변동에 따른 리스크헷지 수단이 부재했다. 발전사업자들과 다른 주 전력회사들은 캘리포니아 전력회사 재정 악화가 심화되자 판매를 거부하고 설비확충 투자를 기피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피크수요는 5000MW 증가했으나 발전설비는 고작 670MW 늘었다. 특히 가공의 수요와 공급 입찰, 인근 주 및 다른 전력사업자와 담합한 허위거래, 송전용량을 초과하는 가공의 수요입찰을 통한 송전선로 무력화, 에너지 파생상품 투기를 일삼는 등 엔론의 전력시장 조작까지 사태는 극한으로 내몰렸다. 5개 대형발전사가 담합해 평균 84%였던 가동률을 50%로 끌어내리기도 했다. 

당시 사태와 올해 사태는 순환 정전이란 현상에선 유사하지만 내용 측면에선 큰 차이가 있다. 우선 과거 전력위기는 전력시장 설계 실패가 원인이다. 당시 현물시장 실패와 시장 조작은 이제 전 세계에 공유돼 더 이상 이슈가 아니다. 반면 올해는 이상고온, 산불, 예기치 못한 전력설비 고장 등이 사태의 원인이다. 2014~2015년 겨울 북미 전력시스템을 극한으로 몰아간 이상한파(Polar Vortex)와 유사하다. 문제는 전력시스템의 경우 단 한 번의 사건이 모든 걸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점이고, 단 시간에 문제해결이 쉽지도 않다는 것이다. 충분한 유연성 자원 확보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19년 전과 올해 위기는 기술측면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캘리포니아는 현재 태양광을 중심으로 재생에너지가 전력시스템에서 혁신의 아이콘이다. 그런데 기존 체계를 파괴하는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와 달리 재생에너지는 기존 기술 쇠퇴만을 초래하지 않는다. 용량(MW) 중심에서 생산량(MWh) 중심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특히 그렇다. 태양광 중심의 캘리포니아 계통에서도 출력간헐성에 대응하는 유연발전자원은 매우 중요하다. CPUC와 CEC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도 많다. 장기계약 부재와 도소매 가격 연동이다. 많은 전력시장 전문가들이 위기 때마다 지적한 내용이고 우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주정부(내부거래)와 연방 정부 규제(주간거래) 이슈 때문에 전력회사간 장기계약이 요원하다.  미연방규제위원회(FERC, Federal Energy Regulatory Commission)는 전통적으로 전력생산비용이 낮은 주와 생산비용이 높은 주 사이 거래를 장려하고 있다. 전체 전력비용을 낮추자는 취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자기 주 이익을 우선시하는 주 규제위원회와의 충돌을 유발한다. 미국 서부의 경우 각주 규제위원회와 FERC의 입장차로 가까운 시일 내 장기계약 문제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도소매 가격연동은 여러 형태가 가능한데 말 그대로 실시간 도매시장가격을 그대로 소매가격에 적용하는 극단적 방법부터 판매회사가 수요예측을 바탕으로 다양한 요금제를 제시하는 온건한 방법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어느나라나 전력요금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이슈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득권 카르텔처럼 고착돼 극단적 상황에 이르기 전 개선이 요원하다. 이는 캘리포니아나 우리나 마찬가지다.

전력산업에서 이론과 현실이 멀다는 걸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2000년초 캘리포니아 전력위기였다면, 안정성 위주로 운영돼 온 우리나라 CBP(변동비반영) 시장은 그 반대의 사례가 될 것이다. 당면한 문제는 우리가 20여년 전 이론에 머물러 있는 동안 현실은 20여년을 앞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캘리포니아 순환 정전과 그 극복과정은 중대한 시험무대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선구자' 캘리포니아가 어떻게 좁혀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채영진 박사 mahatma@kpx.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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