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태중 석장(금강조각연구소장)
"해외문화 수용만이 아니라 한류 타고 외국에 영향줘야"
300점 이상의 문화재 보수 참여…20년간 매월 한 작품꼴

▲윤태중 석장(금강조각연구소장).
▲윤태중 석장(금강조각연구소장).

[이투뉴스] “돌쟁이는 꽃이다. 벌 찾아가는 꽃을 본 적 있나?”

충남 공주시 금강조각연구소 한 켠의 사무실에서 윤태중 석장은 침체기에 들어간 석재산업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방안을 묻자 이렇게 운을 뗐다.

우리나라 석재산업의 호경기는 1970년대부터 1990년까지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만 해도 석재산업은 한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직군이었지만,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시장경제 체제에 돌입하면서 많은 지분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석재산업이 깊은 늪(침체기)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양산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윤 석장은 우리나라 석재산업이 침체기에 들어선 것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석재산업이 가장 활발했던 분야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묘전석물 판매였다. 묘전석물은 말 그대로 묘에 부속된 땅을 장식하는 석재작품을 뜻한다. 단순한 묘비석부터 사자나 천사조각상, 석등, 석탑 등을 아우른다.

윤 석장은 “석재에 대해 공부하다보면 우리나라 석재산업계가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게서 문화침략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석공들은 일본인의 명령에 따라 많은 석물들을 일본양식에 맞춰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고종 광무제가 묻힌 홍릉조차 일본인 감독관과 한국인 석공이 달라붙어 만들면서 국내석물에 일본양식이 파고들었다.

해방 뒤 한국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 산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1970년대에도 수출위주 정책이 실시되면서 일본인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일본양식에 맞춘 석물을 만들어야만 했다. 당시 석공들은 90% 이상이 일본 장례문화 양식대로 석물을 만들어 수출하곤 했다. 이같은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우리나라 석재산업계에는 일본양식이 깊숙이 침투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천하대장군 석물을 깎아내는 윤 석장.
▲천하대장군 석물을 깎아내는 윤 석장.

윤 석장은 “나는 1990년대부터 석공일을 해온 사람”이라며 “전까지 잘나가면서 흥청망청하게 살던 석공들이 직업을 바꾸거나 실업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석재산업계에 그림자가 드리울수록 만들어지는 석물은 오히려 우리나라 고유의 미(美)를 되찾는 모습을 보였다”며 “침체기는 정말 침체하는 과정이 아니라, 석공들이 우리 고유의 미를 되살리고 창출하려는 문제의식을 갖고 주체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최근에는 중국과 교류가 늘어나면서 석물에 중국양식이 섞이는 등 우리문화가 가진 주체성이 다시 옅어지는 상황”이라며 “물론 우리 것이 100% 좋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건 국민의 밑바탕이 되는 의식의 문제”라고 꼬집었다.

침체기로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되려 우리 석재산업이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윤태중 석장은 “이제는 한류열풍을 타고 우리나라 전통의 형태미를 외국에 보여줘야 할 때”라며 “외국인들이 ‘아, 한국문화의 멋이 이렇구나’하고 감탄할 때 우리나라는 외국문화의 영향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외국문화에 영향을 주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장 없는 석공
윤태중 석장은 “지난해는 365일 중 352일을 일했다. 한달에 하루씩 쉰 셈”이라며 “단순히 열심히 사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죽기살기로 매달려야 한다”고 허허 웃었다. 그는 “나는 하루에 다섯시간 밖에 자질 않는다. 억지로 자려고 해도 다음날 어떤 일을 해야할지 상상하면 설레어서 잠이 오질 않는다”며 “짧은 인생인데 목표를 가지고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석공 중에서도 유명한 워커홀릭이다. ‘일의 노예’라는 말을 듣는 일도 심심치 않다. 지난 한 해만 자가용으로 11만km를 주행했다. 일반인의 경우 평균적으로 1년에 1만4000km 가량의 주행거리를 기록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 8배를 뛰어다닌 셈이다. 섬을 제외한 우리나라 내륙이라면 어디든지 당일 7시30분까지 도착하는 것이 그의 자랑 중 하나다. 윤 석장은 이런 워커홀릭 기질이 처음 석공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발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34살 때 문득 ‘한 세상 살다 가기 전에 돌 작품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주변인의 조롱과 가족의 반대가 심했지만 인류의 탄생부터 이어져 온 석공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너무 재밌고 신세계에 온 것 같았다”며 회상했다. 또 “그때는 이틀, 사흘밤을 새가면서 재미로 돌을 두드렸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일이 있었나!’하는 생각 뿐이었다”며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하면서 그렇게 10년을 휴일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윤 석장은 “7년 동안 돌을 두드리니 돌에서 내 냄새가 나고, 8년을 넘어서면서 돌에서 내 빛깔이 느껴졌다”며 “10년이 되면서 나라는 존재가 전국까지 알려져 최고의 건축가들이 내 석물을 찾게됐다”고 말했다. 더불어 “작업장을 가진 석공은 대부분 전시장을 가졌지만 나는 전시장이 없다. 오늘 작품을 마치면 내일은 출고해야 되니까”라며 “남에게 일거리 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본 적도 없고 일은 앞으로 4년 동안은 밀려있다”고 웃었다.

▲윤태중 석장의 금강조각연구소에서 깎아낸 석물들이 출하를 기다리고 있다.
▲윤태중 석장의 금강조각연구소에서 깎아낸 석물들이 출하를 기다리고 있다.

◆“빌린 세상에 석물 끼워 물려주려는 것”
그는 현재 구례화엄사 국보 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을 보수하고 있다. 사사자삼층석탑은 “동쪽에는 다보탑, 서쪽에는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화려하고 특이한 모습의 이형탑이다. 신라시대의 훌륭한 문화유산이지만 1300년이라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지반침하가 일어나 원인을 분석하고 보토작업에 들어갔다. 윤 석장은 “석탑을 축조한 장인들이 공을 들여 석탑을 세우고 1300년 동안 세월이 지반을 다져왔기 때문에 안정된 지반을 다시 건드릴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다만 석탑의 나이만큼 지반은 흙을 잃기 때문에 시대의 석공으로서 보토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동안 300점 이상의 석재문화재 보수에 참여했고 그 중 국보만 30여점에 이른다. 석공으로 일하는 20년 동안 매월 한 작품씩은 보수해 온 것이다. 현재 보수 중인 사사자삼층석탑의 일정이 끝나면 잠시 중단돼있던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보수에 들어갈 계획이다. 팔각구층석탑 보수를 하면서 사이사이 석물 의뢰와 중간중간 박물관이나 문화재 연구소에서 들어오는 긴급보수 요청에 응하면 바쁜 올해도 끝날 전망이다.

그는 과거에 만들어진 문화재만 다루지 않는다. 이미 고 노무현 대통령, 고 이맹희 CJ 회장 등 많은 유명인사의 묘역조성에 참여한 바 있다. 또 국립현대미술관, 삼성 리움미술관 석재작품 수리 등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를 초월해 석재작품 전반에 대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윤태중 석장은 “고대부터 내려온 석조문화재 뿐만 아니라 만들어진지 50년 이상 된 석물은 문화재법에 따라 근대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며 “우리가 현재 만드는 작품들도 50년 뒤에는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감과 의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다음에 올 후배들에게 물려줄 세상”이라며 “이왕 빌려서 사용하는 세상이라면 그들에게 근대문화재라는 석물을 끼워서 물려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진오 기자 kj123@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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