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진표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변호사
"ESG 전도사들이 평화의 사도라는 순진한 생각"

① 탄소제국 몰락의 서곡-엑손모빌 사건 
② 성전(聖典)과 칼 – ESG 자본주의 교리와 통치수단
③ ESG 자본주의 – '기업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이투뉴스/박진표] 사실 ESG 자본주의의 교리는 개별적으로는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없어 보인다. E(Environmental; 환경)는 기후변화, 폐기물, 생태계, 생물다양성 등의 주제를, S(Social; 사회)는 노사관계, 소비자 보호, 인권, 지역사회, 제품안전, 개인정보 및 데이터 보안 등의 주제를, G(Governance; 지배구조)는 이사회 구조, 주주행동, 준법(compliance), 부패 등의 주제를 각각 다룬다. 이미 환경단체, 시민단체, 소비자, 지역사회와 정부는 각자가 담당하는 영역에서 기업들을 압박해 왔다.

그럼에도 ESG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와 같이 시대정신에 부합하지만 언뜻 기업 수익성에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사항들을 기업의 재무성과에 가장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그리고 그간 주주자본주의의 첨병으로 알려져 왔던) 기관투자자들이 기업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2020년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는 주요 기업 CEO에 보낸 연례 서한에서 투자자들이 기후 리스크는 투자 리스크임을 인지하고 있고 앞으로 지속가능투자(sustainable investing)가 고객 포트폴리오의 핵심을 구성하게 될 것임을 밝히며, 블랙록이 앞으로 포트폴리오 구축과 리스크 관리에 지속가능성을 필수적으로 반영하고 지속가능성 리스크가 높은 자산은 매각하고 화석연료를 제외한 새로운 투자상품을 개발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와 같이 기관투자자들이 ESG의 세부 요소들을 그저 어쩔 수 없는 위험요인으로만 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비재무적 요인이 그들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미치는 심각한 시스템적 영향을 깨닫고 이를 시정하려 하거나 보다 적극적으로 이를 돈을 버는 기회로 만들겠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기관투자자들은 자신들의 고객들에 대한 수탁자 의무(fiduciary duty)를 내세워 ESG 투자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러한 각성은 주가와 단기적 재무성과를 중시하는 주주자본주의가 2001년 엔론 사태와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를 유발하였고 극단적인 빈부 격차를 초래하였으며 지역사회와 환경의 가치를 침해했다는 반성에 기인한다.

사실 ESG 자본주의 교리는 어느 순간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당시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의 주도로 2000년 7월 기업과 비영리단체간 네트워크인 유엔글로벌콤팩트(UN Global Compact)가 발족한 것이 ESG의 초석이다. 이후 2006년 4월 UN의 후원을 바탕으로 기관투자자들 중심으로 책임투자원칙(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 PRI) 기구가 창설되고 6개의 책임투자원칙이 제정됨에 따라 ESG는 구체적 형상을 갖추게 된다.

2011년에는 ‘지속가능성 회계기준위원회(Sustainability Accounting Standards Board; SASB)’가 출범하고 2015년 12월 ‘기후변화 재무정보 공개 태스크포스(Task Force on Climate-related Financial Disclosures; TCFD)’가 설립됨으로써 투자자들에 대한 ESG 정보 공개를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법률적 측면에서 투자결정에 ESG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수탁자 의무에 위반하지 않는다거나(2005년 프레시필즈 보고서) 더 나아가 투자결정에 ESG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수탁자 의무를 불이행한 것(2015년 Fiduciary Duty in the 21st Century 보고서)이라는 취지의 연구를 통해 ESG를 법적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법률지뢰 제거작전도 전개되었다.

ESG가 종전에 유행했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과 근본적인 차별성을 지니는 본질적인 이유는 G(governance; 지배구조)라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진 통치수단을 획득한 데에 있다. 사실 CSR은 경영전략의 한 축을 구성하지 못하고 기업홍보수단으로만 활용되었다는 쓰라린 비판에 직면해 왔다. 반면에, 투자자들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ESG는 기업 경영에 실질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관투자자들과 금융기관들이 신규 석탄화력발전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고 대신에 친환경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2010년에는 HP의 잘나가던 CEO가 성희롱 논란에 사임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칼럼에 소개한 엑손모빌 사건에서 불과 0.02% 지분만을 가진 엔진넘버원이 무려 세 자리의 이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를 비롯한 유력한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서를 보면, 새로운 복음을 거부하는 이교도들이나 원주민들을 총칼로 굴종시킨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근대에 들어서도 급진적 이념은 폭력적 혁명이나 전쟁을 초래하였다. 프랑스혁명은 나폴레옹의 대유럽 전쟁으로 이어졌고, 나치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그리고 공산주의는 서방세계와의 수십 년 간에 걸친 냉전을 촉발하였다. 그렇다면, ESG의 전도사들이 베드로나 바오로와 같은 평화의 사도들이리라는 믿음은 순진한 기대에 불과하다.

엑손모빌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ESG의 방법론은 투자자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언제든지 경영진 교체, 위임장 결투 등 주주자본주의 시대에 전개된 살벌하고 치열한 전투과정을 그대로 따를 수 있다. 래리 핑크의 연례 서한 역시 지속가능성 공시와 전략 및 사업관행에 충분한 진전이 없는 경우 이사 선임에 반대할 수 있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투자자로서의 우월적 지위를 배경으로 하는 고압적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ESG의 전도사들은 한 쪽 손에 아름다운 경전을 들고서 이를 읊조리고 있지만 다른 쪽 손에는 불신자를 단번에 베어버릴 수 있는 예리한 칼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ESG와 관련된 사안을 기업홍보수단이나 한때의 유행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고 보면, 현재 우리나라 경영진의 안위를 위협하는 중대재해법도 ESG와 같은 문제의식에 나온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관치국가답게 대다수의 ESG 이슈를 정부 규제와 형사처벌 위주로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ESG가 소비자, 근로자, 지역사회, 환경을 비롯하여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괄함에 따라, 일반적으로 ESG 자본주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거나 주가를 높여야 하는 기업이 ESG라는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경영진이 경영판단을 함에 있어서 공유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회사 내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에 부합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기업의 목적’(corporate purpose)이 무엇일까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업의 목적’을 정의하는 것은 현대 기업재무론과 회사법의 심연으로 빠져들어야 하는, 논쟁의 역사가 매우 깊은 주제이다.

박진표 chinpyo.park@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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