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 시장모델 미래산업 지형에 작동 불능
글.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글 싣는 순서] 
⑥ - 탄소중립과 전력시장의 당면과제
⑦ - 탄소중립을 위한 전력시장 그레이트 리셋 (上)
⑧ - 탄소중립을 위한 전력시장 그레이트 리셋 (下)


[이투뉴스/박진표 변호사] 탄소중립 실행과정에서 나타날 전력시장의 여러 당면과제들은 시장을 현재보다 크게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 것임은 분명하다. 변동성 전원인 재생에너지 비중의 확대는 전력시장을 미시적 또는 거시적 기상 리스크에 취약하게 할 것이다. 전력망 보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전력시장의 불안정성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드러난 지정학적 갈등, 즉 미-중-러의 헤게모니 전쟁 또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재편을 통해 전력거래가격에 장기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견된다.

이처럼 나날이 가시화되고 있는 우리나라 전력시장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전력시장 그레이트 리셋(Great Reset)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전력시장 모델은 현재 전력산업 지형에도 맞지 않는 구식 모델이지만, 탄소중립과 에너지안보 위기가 만들어낼 미래 전력산업 지형에서는 작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 전력산업 지형에 적합한 전력시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종래 전력산업 비즈니스 모델의 효용과 한계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전력산업 최초의 비즈니스 모델은 1900년대 초 사무엘 인설(Samuel Insull)이 고안해낸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이다. 이는 전력시장이라는 것이 탄생하기에 앞서 발전, 송전, 배전, 판매라는 전력공급 기능을 국가 또는 지역의 독점사업자에게 맡기는 사업방식이다. 이 모델은 단일 사업자에게 독점사업권을 부여함으로써 공급구역 내 비효율적 중복 설비투자를 방지하는 한편 규제요금을 적용하여 독점사업자의 안정적 투자회수를 허용하였다.

그 결과 전력산업에 투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전력산업 초창기 전기공급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의 성공은 현대 IT산업의 성공요인과 마찬가지로 기술자본(전력기술), 사회자본(법제도)과 금융자본(투자)의 성공적 결합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발전경로는 국가 주도에 의해 이루어진 점에서 민간 주도로 전력산업을 발전시킨 미국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태평양전쟁 전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대체로 민간자본 주도의 전력산업 발전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러 개발도상국들이 그런 것처럼,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직후 국내 민간자본이 바닥난 상태에서는 국가자본에 의해 전력산업을 발전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에는 자금의 궁극적 원천인 외국자본에게는 국가자본만이 유일하게 신뢰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이 가지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모델 하에서는 발전부문과 판매부문 모두 단일 독점사업자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양 부문에서 경쟁이 존재하지 않았고 양 부문간 거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듯 전력시장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실시간 전력수급 정보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전력계통 관련 정보가 유틸리티 밖으로 나왔을 리 없음은 물론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정보들은 각 부문 담당자간 전화통화 속에서 잠깐 존재하였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터이다.

그리고 이들 정보와 불가분적으로 엮여 있는 실시간 전력의 경제적 가치, 그리고 전력계통의 안정적 운영에 필요한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는 그 누구도 계산하지 못했다. 오로지 사업자의 장기 계획과 단기 예측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만이 전력산업이 안정적, 그리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리라는 믿음을 담보했다. 그렇기에 독점사업자의 독선 혹은 오류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전기요금은 총괄원가 보상원칙에 입각하여 독점사업자가 지출한 매몰비용에 의해 좌우되었다. 애당초 비교대상이 없었기에 매몰비용의 효율성을 문제 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 영국 등 주요국에서 이러한 상황을 상당 부분 타개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전력시장 자유화 조치 덕분이었다. 발전부문과 판매부문 개방, 비차별적 그리드 개방(open access), 그리고 전력시장의 탄생으로 인해, 하루전 내지 실시간 전력수급 정보와 전력계통 정보는 유틸리티의 블랙박스를 벗어나 공개적으로 이용가능한 정보가 되었다.

이에 의해 드디어 인류는 ‘전자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무형의 에너지’에 대해 전날에 시간대별로 또는 실시간으로 경제적 가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기는 선물, 선도 등 거래가 이루어지는 금융상품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나아가, 선진 전력시장은 하루전 내지 실시간 전력수급만으로는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는 전력계통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용량시장, 보조서비스시장 등 다양한 상품시장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전력산업의 작동방식은 독점사업자의 오만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전력산업은 좁게는 전력시장, 넓게는 금융상품시장에 참여하는 여러 사업자들과 전력계통 운영자의 집단지성에 의해 작동하는 거대산업으로 진화하였다. 이런 점에서, 자유전력시장 모델은 산업을 뒷받침하는 사회자본(법제도)을 재구성함으로써 해당 산업의 다른 구성요소인 기술자본과 금융자본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나아가 해당 산업 자체를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시키는 선순환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력당국이 풀어놓은 정산조정계수, 용량계수 등 치명적 버그들이 걷잡을 수 없게 증식해버려 가격 시그널 자체가 크게 왜곡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CBP(변동비 기반 전력시장) 체제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는 자유전력시장 모델에도 분명한 한계는 존재한다. 자유전력시장에서 발산되고 있는 가격 시그널은 안타깝게도 최종 단계의 전기소비자의 행동에 즉각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전력시장의 가격 시그널이 전기요금에 바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반영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전기소비자의 실시간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현실적 제한이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는 원래 자유전력시장 모델이 전제하고 있는 수직적 전력공급체계에 기인한 것이다. 수직적 전력공급체계의 형성은 과거 전기를 저장할 수 없었고 전기의 소비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던 기술적 제약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유전력시장 모델의 한계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정보가 궁극적으로 가격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시장주의자들의 믿음은 어쩌면 정보처리기술의 비약적 발달을 알지 못한 시대의 집단 환상 혹은 주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최첨단 정보처리기술은 미래 전력시장의 불안정성이 야기할 극단적 가격 변동성에 대해 전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희망이 생기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자본이 급속도로 축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데이터 자본이다.

박진표 chinpyo.park@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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