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가 전력생태계를 바꾼다"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글 싣는 순서] 
⑦ - 탄소중립을 위한 전력시장 그레이트 리셋 (上)
⑧ - 탄소중립을 위한 전력시장 그레이트 리셋 (下)
⑨ - 전력생태계 플랫폼화의 조건


[이투뉴스/박진표]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의 한계를 극복한 자유전력시장 모델 하에서 (적어도 선진 도매전력시장에서는) 전기의 공급과 전력계통의 운영은 가격 시그널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런데, 가격 시그널은 과연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가 초래할 전력거래가격의 변동성과 전력공급의 변동성을 비롯하여 탈탄소화가 야기할 여러 도전과제들을 극복하여 전기의 공급과 전력계통의 운영이라는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자유전력시장 모델은 탄소중립 실행에 의해 변화하는 전력생태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전기라는 경제적 재화의 분배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경제적 재화의 부족은 인류의 영원한 생존적 과제다. 인류는 농경과 목축을 통해 수렵채집 방식의 생산량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새로운 생산방식은 홍수, 가뭄 등 기상의 변동성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농경과 목축의 에너지원은 궁극적으로 태양이었기에, 이를 통한 생산량 확대에는 극복할 수 없는 제한이 존재했다.

태양의 문명 시대에 대다수 인간들은 땅에 종속되어 밭 가는 소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러한 운명의 굴레로부터 인류를 구제한 것은 탄소문명이었다. 지하에서 채굴되어 세계 곳곳으로 공급되는 화석연료에서 방출되는 막대한 에너지는 인류를 절대적 빈곤에서 구제했다. 물론 탄소문명 시대의 잉여 에너지가 창출한 거대한 잉여 생산량은 상대적 빈곤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초래했지만 말이다.

경제적 재화의 부족은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분배의 문제를 야기한다. 권력은 부족사회 이래 가장 오래된 분배수단이었다. 노예제, 계급제 혹은 신분제가 고대와 중세의 권력적 분배방식이었다고 한다면, 적법절차에 의한 규제는 근대 이후의 권력적 분배방식이다. 공산주의 배급제는 본질적으로 근대 이전의 권력적 분배방식을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탄소문명이 창출한 잉여 생산량에 의해 고도화된 현대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대부분의 재화에 대한 압도적인 분배수단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즉 시장의 가격 시그널이었다. 가격 시그널의 마력(魔力)은 재화의 거래로부터 재무적인 정보를 추출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는 공급 부족으로 인한 고가격 상황에서는 금융자본의 유입을 촉진함으로써 해당 재화의 공급을 증대하여 경제적 재화의 부족을 해소하는 효과를 낳는다.

전력산업에서 자유전력시장이 구축될 수 있었던 것은 '전기의 상품화(commoditization)'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전통적 전력산업 지형에서 발전기들과 전기소비기기들이 교류(AC) 방식에 따라 동기화되어 동질적이며 안정적인 흐름의 전기를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전기의 상품화를 가능하게 했다. 경제적 재화를 상품화하는 것은 해당 재화의 거래에 소요되는 데이터 처리량(예컨대, 재화의 소유권, 수량, 품질 등)을 획기적으로 줄여 거래비용을 낮춤으로써 대량의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

다만, 전력거래가격은 유효전력의 거래와 관련된 시그널만 취급할 수 있음에 따라 전력계통의 안정화를 위해 요구되는 다른 조건들(예컨대, 주파수 조정, 예비력, 무효전력 공급 등 보조서비스)은 별도의 재화로서 거래되어야 한다.

그런데 탄소중립의 실행은 전기의 상품화를 가능하게 한 전제조건, 즉 전기 흐름의 동질성과 안정성을 상당부분 파괴할 것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의 확대는 전기공급의 변동성을 높이고 전력계통의 관성을 낮출 것이다. 그와 함께 P2P, V2G, VPP 등과 같은 새로운 전력기술들은 수직적 전력공급체계에서 벗어난, 다양하면서도 가변적인 전력공급경로를 만들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로 인해 전력생태계 내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량은 폭증할 것이다. 이와 같이 폭증한 데이터들을 적시에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제어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쩌면 전력수급의 교란과 전력계통의 붕괴는 일상화될지도 모른다.

이 문제를 권력적 분배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전력생태계의 작동방식과 발달과정을 왜곡하여 결과적으로 더 큰 문제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권력적 분배방식은 그 뿌리 깊은 속성 상 데이터 효과적 처리와 제어보다는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결과에 대한 대증적 처방에 주안점을 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력당국이 전기 분배에 관한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전력생태계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CBP시장의 사례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렇다면, 가격 시그널에 의존하는 자유전력시장 모델은 위 문제에 대한 최종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실시간시장, 예비력시장 등의 도입을 통해 고도화 된 자유전력시장의 고해상도 가격 시그널은 속응성 자원을 비롯한 전력계통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투자를 이끌어냄으로써 탄소중립 실행과 IT 기술의 발달이 가져올 전력수급방식 및 전력계통의 복잡성과 변동성에 비교적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로서는 자유전력시장 모델이 탄소중립 실행에 의해 변화된 전력생태계를 규율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로 선전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자유전력시장 모델이 진정으로 탄소중립 실행에 의해 변화된 전력생태계에 최적화 된 해법인지 여부는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치 유튜브 동영상의 해상도를 높일수록 데이터 사용량이 훨씬 더 커지는 것처럼)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전력거래와 전력계통의 해상도를 높여갈수록 그 운영을 위해 처리해야 할 한계 데이터량의 규모와 한계비용이 체증할 것이다. 그리고, 전력계통의 특성별로 구획을 지은 시장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어쩌면 연계운영에 따른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한편 중복투자, 중복보상 등과 같은 문제를 발생시킬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경우, 가격 시그널에 의한 해법은 머지 않아 전력생태계 전체의 재무적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또한, 가격 요동이 야기할 투자회수의 불안정성은 새로운 전력계통 서비스에 대한 만성적 투자 부족을 낳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과도한 가격 변동성이 과도하게 높은 수준의 전기요금으로 귀결되는 경우, 자유전력시장 모델에 대한 전기소비자의 수용성을 크게 떨어뜨릴 우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개별 전기소비자들의 피드백을 반영할 수 없는 것은 이 모델의 근본적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아마도, 현재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임시방편은 유연성 자원인 LNG 가스터빈 발전기와 전력공급 및 보조서비스 제공을 포괄하는 내용의 장기 계약(power purchase agreement)을 체결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를 통해 LNG 발전기에 안정적 수익을 제공함으로써 그에 대한 신규 투자를 유인하는 한편, 사업자로 하여금 발전기 운영에 필요한 연료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게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권력적 분배방식도, 자유전력시장 모델도 전력생태계의 탈탄소화와 새로운 전력기술의 등장이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최적화된 해결책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체 우리에게 어떤 해결책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 문제의 본질은 전력수급방식 및 전력계통의 복잡성과 변동성이 증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력생태계 내 새로운 유형의 데이터가 폭증한다는 표현으로 치환될 수 있다. 문제는, 종래의 전기분배방식 하에서 데이터들이 유용한 작업으로 변환되지 못한 채 전력생태계 바깥으로 무용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데에 있다.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은 실시간 전력수급과 전력계통에 관한 데이터를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렸다. 고도화된 자유전력시장 모델조차도 실시간 전력수급과 전력계통 데이터들은 보존하지만 전기소비자들의 반응에 관한 데이터들은 전력생태계 바깥으로 내다버린다. 전력시장이 적절한 구조로 설계되지 않을 경우 가격 시그널에 반영되지 못하게 되는 데이터들 역시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만약 우리가 탄소중립 실행에 의해 전력생태계에서 생성될 새로운 종류의 데이터들을 적시에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전력생태계를 재구성한다면, 전력생태계의 탈탄소화와 새로운 전력기술의 등장이 야기하는 전력수급방식 및 전력계통의 복잡성과 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전력생태계의 데이터화를 통해 전력생태계 곳곳에 뚫려 있는 구멍들을 막아 데이터들이 바깥으로 증발하지 않도록 한다면, 데이터들은 유용한 작업을 수행하는 가치 있는 자본이 될 것이다.

전력생태계의 데이터화, 그리고 데이터의 자본화는 전력생태계를 전혀 새로운 모델로 '그레이트 리셋(Great Reset)' 할 것을 요구한다. 그 새로운 모델의 유력한 후보는 아마도 전기의 생산, 흐름, 소비 과정에서 취합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전기의 생산, 흐름, 소비를 제어하는 플랫폼일 것이다.

최근 번성하고 있는 배달시장과 택시호출시장을 장악한 배달 앱과 택시 앱이 배달주문과 택시호출이라는 일순간에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개별 데이터들을 처리하고 제어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 이들 데이터를 자본화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탄생시킨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마치 자동차 내비게이션 앱이 이용자들로부터 다양한 수송 정보를 취합, 분석한 다음 이용자들에게 다양한 이동경로를 제시하는 것처럼, 전력생태계에 등장할 플랫폼은 다양한 전기공급자들(전통적 발전자원이나 재생에너지뿐만 아니라 V2G 기능을 갖춘 전기차, VPP 등을 포함한다)과 전기소비자들의 데이터들을 취합한 다음 인공지능 등을 활용한 분석을 통해 플랫폼 이용자들에게 전기공급수익 또는 전기요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플랫폼은 전력수급이나 전력계통 여건을 반영하여 (전기의 공급 또는 소비를 일시적으로 차단하거나 다른 시간대를 이전하는 방식으로) 이용자들의 전기 공급 내지 소비 패턴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순수한 가격 시그널에만 의존하지 않고 데이터 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플랫폼 방식은 복잡성과 변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전력생태계에 최적화된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플랫폼에 의한 전력생태계의 유연성 증가는 전력생태계 내에 더 많은 재생에너지와 신기술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물론 전력생태계의 플랫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력생태계 내의 수많은 장애물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 그 중 가장 공고한 장애물은 기존 전력생태계의 작동방식을 집대성한 코드인 전기사업법이다.

박진표 chinpyo.park@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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