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이투뉴스/박진표] 코로나19의 안개가 걷히면서 우리 눈 앞에 드러나고 있는 세계는 기대했던 바와 너무나도 달랐다. 세계는 더 이상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물질주의적 관점에서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결핍’이다.

장기간의 저유가 추세와 탄소중립 아젠다는 탄소자산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게 만들었고, 이는 탄소문명을 지탱하는 데에 필요한 탄소 공급의 부족 사태를 낳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EU 지각판과 러시아-중국 지각판의 거대한 지정학적 균열은 글로벌 공급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다. 비단 스리랑카와 같은 빈곤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식량과 물자의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결핍의 시대가 뉴노멀(new normal)이라면, 전력생태계의 미래 역시 근원적 결핍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과 EU는 헤게모니 또는 안보적 이유에서 러시아산 에너지의 공급을 봉쇄하기 위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기 공급의 불안정성을 야기할 것이다. 나아가, 탄소중립 실행 과정에서 태양광과 풍력이라는 자연에너지가 비중을 더욱 높여간다면, 전기 공급은 자연에너지의 총량적 한계와 변덕에 좌우되어 더 크게 요동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핍의 만연화가 전기화의 미래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사물이 전기에 의해 작동하는 전기화야말로 인류가 상시적인 에너지 결핍에 대응하여 문명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방법이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전기화가 도대체 어떻게 근원적인 에너지 결핍에 대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전기화야말로 무분별한 에너지 소비를 늘려 에너지 결핍을 더 가속화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의문들은 전기화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다면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을 듯하다. 전기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에너지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에너지를 실어나르는 매개체다. 이 매개체가 나무, 석탄, 석유, 가스, 열 등 다른 에너지 공급 매개체와 명백히 구분되는 특성은 물질의 물리적 이동을 전혀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물론, 미시세계에서의 자유전자의 이동은 논외로 한다). 그저 그리드(grid)라는 공급경로를 설치해 주면, 전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빛의 속도로 달려가 에너지 수급의 격차를 메꿔 버린다. 이런 점에서, 전기화는 에너지 공급의 매개체를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기화를 이렇게만 개념화한다면, 이는 20세기적 사고의 틀 내에 전력생태계를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전기화를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전기 수급의 디지털적 측면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의 데이터 상호교환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데이터와 물리적 매개체가 물리적으로 결합되어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아날로그 방식이다. 인류의 지식은 책이라는 목재섬유 뭉치에 검은 활자 모양으로 고착화되어 있었고 영혼을 울리는 음악은 LP, CD 같은 플라스틱 가공물의 홈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날로그 시대에 데이터를 교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적 매개체의 이동을 수반해야 했기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물리적 매개체의 파괴 또는 변형은 데이터의 파괴 또는 왜곡으로 귀결되었다.

디지털 혁명은 데이터를 특정된 물리적 실체로부터 해방시켰다. 물리적 종속 상태에서 해방된 데이터는 폭발적 팽창을 거듭하여 오늘날 인류가 향유하고 있는 데이터 자본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더 이상 물리적 매개체의 이동을 수반하지 않기에, 데이터 교환은 매우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다(그저 컴퓨터 또는 스마트폰 화면에서 클릭 몇 번만 하면 된다). 디지털 혁명의 더욱 경이로운 점은 물리적 매개체에 결합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데이터, 그리하여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생성 직후 무질서의 공간 속으로 증발해버린 데이터를 매우 낮은 비용으로 포착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혁명은 시장에서 경제적 재화를 교환하는 거래가 체결되는 양상마저 변화시키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시장에는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문지기 역할을 하는 중개자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백화점, 마트, 도소매업체 등 유통업체가 대표적인 문지기다. 이들은 어떤 재화가 자신이 주재하는 시장에서 거래될 것인지를 결정했다. 방송사와 출판사 역시 어떤 프로그램을 송출하지, 어떤 책을 출간할지를 결정했다. 이들 문지기는 과거 통계 수치, 시장조사 결과 또는 직관에 기초한 추정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했다. 그러한 추정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덩어리 형태로만 존재했다. 공급자와 소비자 개개인의 속성을 반영한 개별화된 데이터는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 데이터는 이미 무질서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전력시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경제적 재화의 시장과 마찬가지로, 전력시장 역시 수요 집합과 공급 집합에 대한 과거 통계 등에 기반한 예측을 바탕으로 작동해왔다. 특히 많은 수의 개별 수요로 구성된 수요 집합은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개별 수요 데이터를 취합, 처리,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급예측 실패 등에서 비롯된 비상사태에 직면해 전력시장의 문지기인 계통운영자나 판매사업자가 동원할 수 있는 조치는 순환정전 같은 지극히 정교하지 못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자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공급자와 소비자를 중개하는 사업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바로 플랫폼 사업자다. 이들은 더 이상 문지기 역할에는 흥미가 없다. 유튜브에서 수많은 유튜버들이 생산한 컨텐츠를 시청자 개개인이 직접 선택해서 소비하듯이, 플랫폼에서는 다수의 공급자와 다수의 소비자가 직접, 다시 말해 집합적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덩어리 정보 속에 숨겨진 공급자와 소비자의 개별적 속성을 내포한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디지털 혁명 덕택이다.

이런 플랫폼 비즈니스가 전력거래에도 적용될 것임은 필연이다. 플랫폼은 디지털 혁명이 불러일으킨 시대정신의 현신인 이상 전력생태계도 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전기는 물질의 물리적 이동을 수반하지 않은 채 거래되므로, 플랫폼 거래에 가장 적합한 에너지 공급 방식이다. 이렇듯 플랫폼을 통해 전력거래가 이루어질 경우, 공급과 수요가 직접 연결되어 소비자는 클릭 몇 번으로 재생에너지 전기의 소비를 선택할 수 있다. 플랫폼은 결핍의 시대에 빈번하게 발생할 전기 수급과 변동성 문제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개별 공급, 개별 소비 단계에서 제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전기가 보다 절실한 소비자, 보다 중요한 목적에 우선 공급되도록 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플랫폼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해 우선순위가 밀린 소비자가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않도록 전기 공급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마치 기본소득처럼 에너지빈곤층에 대해 꼭 필요한 목적의 전기 공급을 보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랫폼은 VPP, V2G 등 다양한 공급경로 가운데 전력계통 운영을 최적화하는 경로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전기화를 데이터에 기반한 디지털 에너지 공급 방식으로 해석하여 실행한다면, 비록 우리가 에너지 결핍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문명적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에너지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박진표 chinpyo.park@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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