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생태계 디지털 플랫폼화의 조건 /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이투뉴스/박진표] 현재 유럽 전력시장은 극단적 가격 급등을 빈번하게 겪고 있다. 지난달 20일 영국 내셔널그리드(National Grid)의 전력계통운영기구(ESO, Electric System Operator)는 무더위로 전기 수요가 급등하자 무려 MWh당 9724.54 파운드(약 1만1685 미달러)를 지불하고 벨기에로부터 전기를 수입했다. 지난해 영국은 전기를 수입하기 위해 MWh당 1600 파운드 미만을 지불했다. 올해 7월 18일에는 당시까지 최고가인 2000 파운드를 지불했는데, 단지 이틀 뒤에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가격이 상승한 것이다. 과도한 금액을 지불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겠지만, 영국의 계통운영자로서는 블랙아웃이 초래할 어마어마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고려했을 때 아마도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초유의 가격 변동성은 뉴노멀(New Normal)의 명백한 징조다. 지난 30년간 지속된 글로벌 대통합 시대가 저물면서 초강대국들은 상호 갈등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간 안정적으로 보였던 글로벌 공급망에 거대한 지정학적 단층선을 따라 심각한 균열이 생겼음이 드러나고 있다. ESG로 대표되는 환경과 사회라는 시대정신 역시 탄소문명의 경제적 기반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리는 등 거대한 전환(Great Reset)을 이끄는 근본적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마도 대전환 과정에 수반할지 모를 대침체(Great Recession)만이 가격 변동성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국부의 상당 부분을 수출에서 얻고 있는 우리나라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특히, 에너지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대전환 또는 뉴노멀에 매우 취약하다. 화석연료는 말할 것도 없고 재생에너지조차 불충분하기에, 자칫 잘못된 정책을 펼칠 경우 국가의 에너지 공급망이 처참하게 붕괴될 수도 있다. 대안으로 떠오른 수소와 CCUS(탄소포집이용저장) 기술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여 아직은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일각에서 꾸준히 주장하는 슈퍼그리드는 지정학적 단층선 위에 건설될 것이기에, 노르트스트림(Nord Stream) 2 프로젝트 사례에서 보듯이 지정학적 지각 변동이 발생한다면 전복될 수도 있다. 가스 공급 문제로 푸틴에게 전전긍긍하는 유럽 국가들의 곤혹스러움에서 드러나듯이, 에너지를 특정 국가에 크게 의존하는 것은 상대국의 에너지 볼모로 잡힐 수 있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러한 대격변이 초래할 에너지 결핍이 미래의 상수가 될 것임을 고려할 때 전통적 접근법, 즉 수요가 전부 충족될 때까지 신규 설비를 구축하는 것은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없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화석연료 발전소들이 축출되는 상황에서, 기상 리스크 증대와 전기화로 인해 피크 수요가 급등할 것이므로 발전소, 송전망, ESS 등 물리적 설비 구축에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 확산으로 인한 전력계통 운영의 어려움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가치관과 재산권이 고도로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물리적 설비 구축은 지역수용성, 환경성, 안전성이라는 제약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렇듯 새로운 시대, 변화하는 시대정신에 맞춰 전력공급체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바꾸어야 한다. 지난 기고들을 통해 설파하였듯이, 전력공급체계를 디지털 플랫폼으로 변모시키는 것, 다시 말해 데이터를 활용해 전기 공급과 수요를 실시간으로 제어함으로써 전기수급을 최적화하는 것이 유력한 대안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소비자들의 자발적 참여와 스마트한 제어를 통해 수요 제어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전력공급체계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을 만든다고 해서 이를 당장 실행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현행 전력공급체계가 전기사업법, 전력시장운영규칙, 송배전망 이용규정, 전기공급약관 등 여러 법제도적 기반 위에 운영되는 이상, 새로운 전력공급체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기존 법제도적 기반을 교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우버, 타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것은 법제도적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럼 전력생태계를 디지털 플랫폼의 공간으로 재편하기 위해서는 어떤 법제도적 변화가 요구되는가? 우선, 플랫폼이 발전부문과 판매부문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들을 실시간으로 통합 처리, 제어할 수 있게끔 양 부문의 통합을 허용해야 한다. 통합의 방식으로는 법적 통합(즉, 겸업)과 계약적 통합이 있을 것이다. 원래, 전기사업자는 전력거래가격 리스크 헤지, 장기 연료 도입과 대규모 설비 구축 등을 통해 안정적 사업구조를 갖추고자 발전·판매 기능을 통합할 유인이 있다. 이는 전기사업자의 안정적 전기공급을 가능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국가 에너지안보에도 기여한다.

디지털 플랫폼을 위한 발전·판매 통합은 고전적 수직통합체계로의 회귀로 비칠 수 있고, 이 점에서 기존 유틸리티 기업들이 보여준 비효율성이라는 폐해가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여러 배달 플랫폼 기업들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자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처럼 전력생태계에 복수의 플랫폼 기업이 설립되어 상호 경쟁이 전개되도록 한다면,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의 한계의 근원인 독점을 해소한다면, 수직통합체계는 오히려 거래비용을 크게 낮추는 효율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판매시장의 개방이 필수적이며, 계약시장의 도입은 플랫폼 기업 도입의 촉매로 작용할 것이다.

전기사업자의 전기공급의무도 완화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의 비즈니스 모델은 공급과 수요를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것이므로, 엄격한 전기공급의무를 강요한다면 비즈니스 모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전력생태계에 막대한 부담을 야기하는 전력거래가격 급등은 한도 없는 전기공급의무에 기인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소비자들에게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가격이 얼마든지 간에 무조건 전기를 확보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터무니없음을 알 수 있다. 전기회사들의 파산과 국유화로 얼룩져가는 유럽 전력시장의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전기공급의무에 일정한 제한을 둬야 한다.

다음으로, 소비자별로 전기공급을 차별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개인화 또는 초개인화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므로, 고객맞춤형(bespoke) 전기공급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전력공급체계는 과거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소비자들이 전기공급의 안정성과 품질에 대해 동일한 선호도를 가진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전기공급이 부족한 경우 전력당국이 무차별적인 소비자들 중 임의로 선택된 자들에 대한 전기공급을 차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디지털 플랫폼은 요금구조 설계와 데이터를 통해 소비자들의 다양한 이질적 선호도를 포착하여 이를 바탕으로 전기수요를 고객맞춤형 방식으로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전력산업 진입규제에 대한 대대적 변경이 필요하다. 프로슈머가 등장하고 V2G, VPP 기술이 개발되는 마당에 발전과 판매를 구분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전력계통의 안정성을 위한 규제가 필요하다면, 전력당국이 인가제나 등록제를 통해 인가기준이나 등록기준 충족 여부만 판단하면 될 일이다. 현행 허가제는 사무엘 인설(Samuel Insull)이 고안한 규제협정(regulatory compact)에 의거해 기존 사업자의 독점사업권을 보장하기 위한 고전적 유틸리티 모델의 유산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산업의 도약과 성장은 기술자본, 금융자본, 그리고 사회자본(법제도)이 성공적으로 결합한 때에 가능했다. 전력생태계의 디지털 플랫폼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자본과 금융자본이 끊임없이 유입될 수 있도록 사회자본의 혁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박진표 chinpyo.park@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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