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학 ㈜브이피피랩 대표이사

▲차병학 브이피피랩 대표
▲차병학 브이피피랩 대표

[이투뉴스/차병학 브이피피랩 대표] 조지 웨스팅하우스와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와 토머스 에디슨의 직류 전쟁, 그리고 전력산업의 탄생과 이를 둘러싼 자본의 냉혹한 속성을 다룬 영화 〈커런트 워(2019)〉는 어둠 가득한 미국 뉴저지주의 한 들판에서 시작한다. 1880년, 아직 세상은 등불로 빛을 만들고 기계는 증기나 손발로 움직이던 시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의 신사들은 빛을 내는 전구에 넋을 빼앗긴다. 눈앞에서 하나둘씩 켜지며 들판을 가득 메운 불빛들은 인류의 삶이 송두리째 달라질 거라는 예고이자 신문명 시대로 들어가는 초청장이었다.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콜럼버스 도착 4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The Columbian Exposition of 1893)’ (이하 ‘시카고박람회’)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탄생과 팽창을 알린 신호탄이자, 신문물이 충돌하는 격전지였다. 이 박람회의 전력공급을 위한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판사, 시장, 기자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웨스팅하우스에게 당신과 계약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 웨스팅하우스는 무덤덤하게 견적표를 제시하면서 “우리 시스템이 (에디슨의 그것에 비해) 월등히 좋고 게다가 싸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답으로 발표를 마친다. 에디슨은 구구절절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고, 모함과 폄하를 전략으로 삼았지만, 낙찰은 결국 웨스팅하우스에게 돌아갔다.

웨스팅하우스는 끊임없이 에디슨을 만나려 했으며, 동업이나 협업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내려 했다.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무리한 욕심으로 비용을 들여 울타리를 치기보다, 비용을 공평히 부담하거나 개방을 통해 시장을 두 배로 늘려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결국 더 큰 이익이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가치 있는 서비스의 제공’, 더 직설적으로는 ‘소비자가 돈을 내고 쓸만한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태생적 숙명을 지닌 스타트업들이 금과옥조로 삼을 명제다.

스타트업의 금과옥조 '가치 있는 서비스 제공'
세계 200여 개 나라가 기후변화 협정에 참여해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을 1.5℃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 각자 2030년, 2050년을 기점으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내건 상태다. 태양광·풍력 발전이 그리드패러티를 달성해 급격히 시장을 키우고 있고, 내연차는 빠르게 전기차로 대체되고 있다. 그 한복판에서 에너지 스타트업들은 사회적 가치와 자본적 가치의 중간쯤 어디에서 인수와 합병, 매각, 그리고 명멸이라는 흥망성쇠의 운명을 맞고 있다.

설립된 지 8년도 안 된 에너지플랫폼기업 영국 옥토퍼스에너지의 기업가치는 6조원에 달하고, 독일 엔팔과 필라스사는 태양광·풍력이 갖는 변동성을 인공지능(AI)과 VPP(Virtual Power Plant, 가상발전소) 기술로 극복하려는 초기 시도에 거침없이 투자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신생 배터리 스타트업 아워넥스트에너지(미국)에 4000억원을 투자했다. 부러움을 넘어 경외심까지 느끼기도 한다. 전쟁과 빠른 기후변화 속에서도 세계 굴지의 투자자들이 에너지 스타트업에 과감하게 베팅하고 있다.

영국 한 기관 집계에 따르면, 글로벌 에너지기술에 대한 벤처캐피털(VC) 투자는 20년 99억 달러(약 13조원)에서 이듬해 222억 달러(약 30조원)로 1년 만에 124%가량 증가했다. ESG 투자열풍도 한몫 했겠지만 이들기업이 시장에서 경쟁해 소비자들의 생활을 바꾸고, 습관을 움직이게 하는 서비스를 사업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단순히 가격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바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고 시대적 소명에 부합하는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구조가 부러울 따름이다.

▲英 옥토퍼스에너지 개요 ⓒ사진 옥토퍼스에너지
▲英 옥토퍼스에너지 개요 ⓒ사진 옥토퍼스에너지

전 세계 큰손들은 에너지 스타트업에 앞다퉈 베팅
반면 우리의 현실은 씁쓸하기 그지 없다. 에너지 산업, 특히 전력산업은 시장에서 제품과 서비스로 경쟁할 기회를 주지 않고 지원사업과 실증사업, R&D 국책사업 등 고만고만한 규모의 사업으로 연명하게 하고 있다. 직접 PPA(전력구매계약) 제도를 오랜 논의 끝에 태동시킨 뒤 한전이 갑자기 전용요금제를 출시해 해당기업들이 황망했던 사례는, 협소한 전력시장에서 그나마 가치있는 서비스를 만들어보겠다고 고군분투했던 스타트업들 입장에선 다소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름의 고민과 사정이 있었겠지만, 시장에서 해볼 만한 일들을 만들어 주고, 공정한 경쟁과 룰을 만들어 주는 본연의 역할에 더 집중하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고, 비전은 연속성이 없다. 재생에너지 발전비중 목표를 2030년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 계획안 기준 30.2%에서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상 21.6%로 축소한 것도 가까운 예이다. 게다가 제10차 전력계획은 재생에너지를 출력제한하고 있는 제주에 신규 대규모 LNG복합발전소를 설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이미 우리는 여러차례 쓴잔을 마신 적이 있다. 2007년부터 추진된 스마트그리드-에너지 신사업, 2011년 순환 정전 이후 ESS 사업, 친환경 에너지자립섬 등이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를 잘 알고 있다. 2021년 신설된 소규모전력중개시장은 입안까지의 기간도 기간이지만, 사업의 경제성을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에서 예측제고정산금이 책정돼 서비스 공급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사업을 진행하거나 사업을 포기하고 있다. 올해 제주에서 시범 개설 예정인 실시간 전력시장 역시 정착까지 10년 이상 소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특히 분산전원 시대에 대한 기술적 해법이라 평가받는 VPP사업 같은 신산업은 전기사업법에 새로운 사업으로 정의하고, 시행령을 포함한 하부 제도로 사업과 시장제도 전반을 규정해야 하지만 매번 한전의 적자와 전기요금 이슈로 신사업을 포함한 제도·정책의 검토가 모두 무산되고 있다. 투자자들 역시 에너지사업은 정권에 따라 정책이 갈짓자 걸음을 하는 고위험 사업으로 인식하고 있다.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최고의 인재를 채용하고 자금을 융통해야 할 스타트업들은 이도저도 못하고 정부나 기관의 지원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있다.

▲ⓒ옥토퍼스에너지
▲ⓒ옥토퍼스에너지

정책은 일관성이 없고 비전은 연속성이 없다
다시 영화 〈커런트 워〉로 돌아가보자. 알다시피,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와의 전류 전쟁에서 패한다. 그러나 절치부심한 후 활동사진으로 특허를 취득하고 발전시켰으며, 그렇게 영화라는 새로운 거대한 산업이 탄생했다. 운신의 폭이 거의 없는 대한민국 전력시장에서 그것도 스타트업을 경영하는 일은 매일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일과 같다. 그런 필자가 <커런트 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설익은 제품을 내놓기 망설여하는 에디슨에게 그의 비서 사무엘 인설이 "제발 일단 출시를 하라"고 다그치는 모습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전력산업에 가장 필요한 통찰을 가진 인물은 웨스팅하우스도, 에디슨도, 테슬라도 아닌 비서 인설인지 모른다. 전구, 필라멘트뿐만 아니라 에디슨이 밤을 새워 발명하고 개발했던 축음기와 녹음기를 일단 먼저 시장에 내보내 반응을 보고 개선하고, 돈을 벌라는 이 단순한 지침이 에디슨 같은 위대한 개척자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경쟁자에 앞서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작’하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지금, 우리의 스타트업들에게도 시작할 기회가 있을 거라 믿는다. 어둠 가득한 130년 전 시카고의 박람회장을 우아한 빛으로 비추었던 수십만 개의 전구들처럼, 세상 사람들의 삶에 이바지할 아름다운 서비스를 만들어 볼 기회 말이다.

차병학 ㈜브이피피랩 대표이사 bhcha@vpplab.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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