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 한국전력 이사회 의장] 국내 발전량·전기사용량 이미 포화
원전수출은 착실하고 꾸준히 다져온 노력의 결실
“운도 좋았지만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 아니다”

< 대담 = 이재욱 본지 발행인, 정리 = 장효정 기자, 사진 = 이성수 기자 > 


 

[이투뉴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빚어낸 눈물겨운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말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대한 원자력발전소 수출. 수출을 위해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총력전을 벌였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운이 좋기도 했지만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 원자력산업이 경쟁력을 갖출수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인 조선전업공사에 1961년 입사, 사장을 거쳐 현재 한국전력 이사회를 이끌고 있는 이종훈의장을 만나 우리나라 원자력의 오늘이 있기 까지를 들어봤다.

이 의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뒤 조선전업 공채 5기로 입사, 영월발전소에서 전기와의 인연 50년을 시작했다. 이 의장은 특히 엔지니어로서 발전소 건설과 운영, 보수 등에 전문적인 경험과 식견을 쌓으면서 73년부터 원자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원자력건설부장으로 재직중이던 73년 석유파동이 났습니다. 우리나라 첫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의 준공 목표는 75년이었습니다만 석유파동으로 원자재가격이 폭등했습니다. 당시 영국과 미국회사가 원전 건설을 맡았는데 공사를 할수록 손해가 난다며 공사를 자꾸 지연시켰어요. 당시 김영준 한전 사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2000만달러를 더 주고 공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전은 원자로 공급업체였던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계약을 다시 체결하면서 통합관리팀(IMT)을 구성함으로써 우리 기술진이 미국 사람들과 함께 프로젝트 관리를 하도록 했다는 것. 이 의장은 당시 한전의 우수한 기술자들이 세계 유수업체인 웨스팅하우스의 프로젝트 관리에 대한 노하우를 배울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돌이켜보면 석유파동이라는 위기가 있었기에 우리가 첨단기술 및 사업관리에 접근할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이런 기술습득 및 프로젝트 관리 실력으로 다음에 발주한 고리 3, 4호기 부터는 우리가 직접 사업관리를 할수 있었다.

국산화를 위한 장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고리 3, 4호기 부터는 설계부터 시공 및 사업관리를 통째로 맡는 턴키방식에서 벗어났다. 주기기는 웨스팅하우스, 주변기기는 영국 업체로부터 가져오더라도 가능한한 우리 부품을 많이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미국 벡텔사와 계약을 맺어 우리 기술진 50명을 파견했습니다. 국산을 많이 쓰기 위해서였죠. 한전이 로스앤젤레스 사무실을 개설한 것도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기계를 개발하도록 국내에 공시하고 스펙을 잘 갖춘 제품이 개발되면 우선 구매해주는 정책을 썼습니다. 원자력 주변기기 업체들로서는 판로가 절로 확보되는 셈이었으니 사업 리스크를 크게 줄일수 있었고 국산화를 앞당기는 견인차가 되었습니다.”

원자력발전소의 주기기인 원자로의 비중은 13~15%이며 터빈이 7~8%. 나머지는 부품 관련 기계라고 보면 된다. 비록 우리가 원자로와 터빈 등 기술을 당시 갖추지는 못했지만 국내 산업 육성을 통해 주변 기기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튼실하게 실력을 쌓아왔던 것. 이런 노력들이 합해져서 오늘날 국산화율 95%를 달성하게 됐다.

기술 자립을 앞당긴 것은 세계적으로 원자력이 암흑기를 맞았던 80년대 국제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원전 사고로 미국은 원전 신규 건설을 전면 중단했다. 더욱이 체르노빌 사고까지 겹치면서 전세계 원자력계는 거의 숨을 멈추다시피했다. 이런 기회를 틈타 우리는 영광 3, 4호기를 발주하면서 기술적으로 한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원전을 발주하는 나라가 없었으니 우리나라의 원전 발주에 웨스팅하우스를 비롯해 굵직굵직한 업체가 다 모였다. 이중 경영난에 허덕이던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은 매우 적극적으로 나와 우리가 유리한 협상을 이끌수 있었다. 원천기술의 이전은 물론이고 한국원자력연구소 핵심요원 50명이 컴버스천엔지니어링 본사에서 연수를 받기 시작했고 영광원자력 3, 4호기에 들어갈 100만kw급 원자로 설계에 참여하면서 그 소스코드를 고스란히 익힐수 있었다. 심지어는 당시 계약조건에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이 향후 10년동안 개발할 기술도 모두 우리에게 이전해주는 조건도 포함돼 있었다고 이 의장은 설명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순히 풀린 것만은 아니다. 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바람이 불며 원자력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면서 원전계약이 곧 5공비리로 낙인 찍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조사를 받는 등 홍역을 겪었다. 국회의 추궁에 이어 150여명이 강도높은 수사를 받았지만 특별한 부정이나 비리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 이 의장은 당시 담당검사가 후에 검찰총장이 됐는데 정확한 수사와 바른 판단을 했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이 의장은 우리가 아부다비 원전 수출에 성공한데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경험도 크게 기여했다고 귀띔.

“(원전 수주후)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아부다비 원전 수출을 위한 발주처와의 질의 응답 등 과정에서 KEDO 운영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KEDO를 운영하면서 철저한 검증을 받은 것이 이번에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전의 우수한 인력이 고생했던 보람을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가 UAE로부터 원전 4기를 수주하는데는 가격경쟁력과 공기단축 또한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의장은 다른 나라들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하고 있지 않을때 우리나라는 영광원전 3, 4, 5, 6기와 울진원전 3, 4, 5, 6기 및 신고리원전 1, 2기와 월성원전 1, 2호기 등 모두 12기를 건설하는 경험을 쌓아온 것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똑같은 표준원전 12기를 짓는 과정에서 가격경쟁력이 생길수밖에 없다는 것. 공기단축도 같은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게 이 의장의 설명이다.

이 의장은 17년전 한전 사장으로 부임했을때 해외진출만이 살길이라면서 해외사업단을 발주했다. 1인당 전기사용량도 한계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발전소건설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당시 공기업이 무슨 수출을 하느냐고 했지만 필리핀에 발전소를 건설하는 등 해외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의장은 앞으로 세계적으로 430기의 원전이 새로 건설될 예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20%만 차지하더라도 200조~300조에 이르는 어머어마한 규모라며 그동안 닦아온 실력을 바탕삼아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의장은 최근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원전 수출 전담조직의 신설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은 힘을 모야야 할 때이지 분산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원전 수출을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수력원자력을 한전과 통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현재는 80여명을 파견받아 수출업무를 하고 있지만 소속사가 달라서는 효과적인 업무수행에 문제가 많다는 것.

이 의장은 전력구조 개편 작업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 발전 분야 경쟁을 위해 화력발전소를 5개로 나눠놨지만 발전회사의 원가중 연료비가 8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뭐를 갖고 경쟁할수 있느냐는 것이다. 덩치를 키워야 할때 잘개 쪼개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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