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자원협력 비화-석탄공사편②] 북한 석탄광 공동개발 양해각서 유명무실

[이투뉴스/조찬제] 아스트라상사는 북한산 괴탄(덩어리탄)을 중국을 경유해 포항으로 반입했다. 1톤 팩으로 포장해 가져 왔는데, 이 가운데 4분의 1은 포장이 터져 있었다.

규격이 일정하지 않은데다 이물질이 혼입돼 있었고, 석탄과 잘 구별되지 않은 경석(돌)들이 섞여 있어 별도 선별을 하지 않으면 상품가치가 없을 것 같았다.

마땅한 판매처도 없이 무장적 반입한 것이다. 필자에게 이 탄을 팔아 달라는 부탁이 왔다.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북한탄을 처음 들여온 것에 의미를 두고 친분이 있는 기업에 전량 판매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북한탄이 전혀 수입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냉전시기인 1980년대까지도 러시아, 중국, 베트남, 북한산 석탄이 아시아 A, B, C 탄 등으로 분류돼 반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남북 해빙 무드를 타고 최근 북한탄을 가져온 것은 아스트라상사가 유일했다.

연탄 수요가 늘어나자 민간업체들은 연탄용 무연탄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하고 석탄공사와 함께 북한 무연탄 반입을 추진하고 싶어 했다.

석공도 독자적으로 북한 석탄광 개발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민간업체를 앞세워 대북사업을 추진하고 싶어했다.

먼저 일본 총련계 A사가 석탄공사 사장을 평양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북한의 초청장을 받아내기 위한 경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 업체는 기존 일본 총련 라인을 동원해 초청장을 받아 내려고 했다.

누가 평양에 갈 것인지 명단을 취합했고, 평양에 가기 위한 방북교육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 기한까지 초청장을 받아오지 못했다.

또 다른 업체는 대북 경공업 관련 경험이 국내 최고 B사였다.

B사 대표는 사장, 임원진, 심지어 감사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석탄공사가 북한에서 석탄광산 개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잡아 주겠다고 하면서 사장을 평양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거의 성사가 될 뻔했지만 중도에 무산됐다.

평양 방북을 비밀리에 추진했는지 실무부서인 대북사업팀은 사장이 평양을 가는 지도 몰랐다. 당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중도에 그만 둔 정치인도 방문단에 포함돼 있었다. 대북특사 얘기도 있었다.

워낙 최 윗선에서 추진하는 사안이라 필자와 사업을 검토했던 업체는 완전히 밀려나는구나 생각했는데, 갑자기 평양 방문 일정이 무기한 연기되더니 아예 없던 일이 됐다.

아스트라상사도 평양 방문을 추진했지만 기한내에 초청장이 오지 않았다. '이 업체도 공수표를 날리는구나' 싶었는데, 뜻밖에 초청장을 받아냈다.

공기업 직원들은 남북경협사업을 반신반의하며 누가 먼저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초청장을 받기 위해 사전에 명단을 제출해야 하는데, 경영진은 정부 승인없이 갈 수 없다며 명단제출을 거렸다.

필자와 대북사업 경험이 많은 공사 고문만이 명단을 냈다.

막상 초청장을 받아들고 평양을 가려니 직급이 낮은 필자가 석공을 대표해 평양에 가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지 공사 내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석탄 반입 여건 및 부두 현황 파악을 위해 출장을 가는 것으로 하고, 남북경협사업 협의는 출장목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이때 경협사업 경험이 많은 고문을 앞세워 많은 일을 협의했고, 필자는 직급 이상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필자는 자주 평양을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줄곧 대북사업 전문가 대우를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첫 평양 방문 시 석공공사 고문과 필자, 광물자원공사, 아스트라상사, 대상, 포넷을 비롯한 5개사 8명이 방북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5년 6월 석공사장을 비롯해 산자부 과장급 2명과 8개 민간 업체 사장 등 15명이 평양에 입성했다. 석탄공사 사장도 평양을 방문하고 난 이후 민간업체와 공동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하고 싶어했다.

아스트라상사는 북한 무연탄을 포항으로 반입하기도 했는데 아직 산업용 수요가 거의 없었던 터라 판매가 무척 어려웠다. 또 다시 필자의 부탁으로 물량을 처리했고, 이때 남북자원교역에 깊이 빠져든 것 같다.

석탄공사와 대북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싶어 하는 업체가 너무 많이 나타나자 석탄공사는 북한 석탄을 먼저 가져오는 업체에게 공동사업 추진 우선권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일본 총련 관련 업체가 먼저 가져올 줄 알았지만, 아스트라상사가 가장 먼저 북한산 탄을 싣고 포항으로 내려왔다. 석공과 아스트라상사는 북한 석탄광 공동개발에 대한 양해각서를 어렵게 체결했다.

하지만 이 양해각서가 잘 이행되지 않고 유명무실해졌다. 사장과 감사는 계속 다른 업체를 밀고 있었고, 실무 책임자급은 또 다른 업체를 지원했다.

당시 필자는 아스트라상사와 총련 관련 업체의 실무를 모두 보고 있었다. 곧 부서장(팀장)이 교체됐다. 이 선배도 대북사업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도 왜 이 자리에 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석공의 인사가 왜 이렇게 운영됐는지 모를 일이다. 상도의상 경쟁관계에 있는 두 업체의 실무를 보는 게 곤란할 것 같고, 향후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아 새 팀장과 업무를 분담하기로 했다.

양해각서가 법적 효력이 거의 없는 것인 줄 그때서야 절감하게 됐다. 공식적인 대북사업은 아스트라상사와 하고 있지만 비공식적인 사업은 다른 업체와 이뤄졌다.

심지어 사장이 그 업체와 대북사업을 계속하겠다고 중국 베이징에 있는 민경련 베이징 대표부에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북한도 혼선을 빚었다. '석탄공사가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평양 출장 때마다 얘기했다.

특히 남북경협사업을 석공이 2개 업체와 동시에 추진하고 있으니 석공의 진의가 무엇이냐며 따지기도 했고, 평양 방문 시 명지총회사에 민간업체를 배제하고 직접 석탄개발 사업을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북한은 우리와 달리 모든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게 아니고, 중앙의 허가를 받는다. 모든 정보가 한 곳으로 모이기 때문에 대응력 및 협상력이 클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장이 열려 대북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지만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각자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기에 2~3년 정도 머물고 가는 사장이 대북 특수업무를 초기에 장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장은 평양을 다녀오고 난 이후에도 아스트라상사와의 대북사업 추진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다. 사장이 중립적인 입장이라면 관련 경영진 임원들은 반대 입장이었고, 실무 책임자는 극구 반대했다.

실무자였던 필자만 이 사업에 호의적이었다. 이렇게 분파가 나눠져 있으니 일이 제대로 추진될 리 없었다. 양해각서 이후 본 사업 추진은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수차례 정부부처에 들러 북한 석탄 반입 및 석탄광산 개발사업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해야 했고, 국회도 수시로 들락거렸다. 남 앞에 잘 나서지 않던 내 성격이 싸움 닭처럼 저돌적이고 투쟁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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