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복 산업부 차장

[이투뉴스] 해외 태양광기업의 국내사업 COO(최고운영책임자)를 만났다. 업황만큼이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세계시장 점유율 'TOP 10' 이내의 기업이 이럴진대 순위권 한참 바깥에 있는 국내기업은 오죽할까.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국내 기업들의 폐업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호시절 '태양광 대세론'과 함께 진입해 좌판부터 깔고 앉은 기업들이 도미노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이들은 과거 정부 보조금으로 창출된 내수시장에서 가급적 경쟁을 회피하며 틈새시장을 노리는 전략을 택했었다. 애초부터 정부가 지속적으로 시장을 만들지 않으면 연명이 어려운 구조였다. 요즘처럼 과도한 공급과잉 상황을 버텨낼 자생력이 없는 것이다.

당분간 RPS(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라는 '산소마스크'를 꺼내 쓸 수 있겠지만, 이미 호흡기능을 상실한 중환자가 많아 의미없는 수명연장이 될 공산도 크다.

시장을 지나치게 낙관해 투자에 무리수를 뒀던 기업들도 떨고있기는 마찬가지. 수요감소로 일감이 크게 줄었는데 가격마저 원가이하로 폭락하고 있다. 이들도 언제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으로 끌려가 절명할지 알길이 없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언제 이 시장에 다시 서광이 비칠지 가늠하기 쉽지않다는 것. 앞서 과거 시장은 수요에 따라 공급부족(Shortage)과 공급과잉(Over-supply)이 일정한 싸이클로 반복됐다. 2008년 스페인에서 지핀 불길이 전 세계적 금융위기로 꺼져갈 때도 그랬고, 지난해 이탈리아에서 되살아난 불씨가 역시 경기침체로 사그라들 때도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기대를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그리드패리티가 실현돼 시장이 자발적으로 팽창하지 않는 한 또다시 수요가 공급을 촉진하는 그런 호시절은 오지 않을 거라는 게 보수적으로 이 시장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업계에서 "강한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자"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선두그룹의 풍경은 영 딴판이다. 초기부터 막강한 정부지원을 등에 업고 몸집을 불려온 일부 중국 기업들은 시장상황을 비웃듯 지금도 경쟁적으로 설비증설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이들이라고 마냥 속이 편할 리 없다. 페달을 멈추는 순간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한번 선두에서 밀리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선두그룹의 이런 경쟁이 가열될수록 이미 대열에서 멀어진 우리와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단순히 덩치만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혁신기술 개발에도 어느 때보다 힘을 쏟아붓고 있다. 1~2개 기업의 R&D 투입예산은 국내 관련기업 전체 R&D 예산과 맞먹을 정도다.

최근 중국을 다녀온 한 대기업 전문가는 "기술로도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라면서 "이제 삼성, LG 누가 붙어도 쉽게 전세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올초만 해도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한 삼성전자가 태양광사업을 계열사인 삼성SDI로 이관한데 이어 최근 사업자체를 무기한 유보키로 했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일찍이 이 시장에 뛰어든 현대중공업도 생존전략 마련에 부심하고 있고, 뒤늦게 가세한 LG전자도 실적이 초라해 면을 구기고 있다. 

'태양광을 제2의 반도체 산업으로 키우겠다'고 호언했던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 태양광 산업은 이대로 패자가 되어 승자가 누리는 영광을 지켜만 봐야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낙담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한다. 지금은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그리드패리티 이후의 '태양광 2.0시대'를 준비할 때라고 말한다.

과거 태양광 시장은 설치·시공기업과 제조사간에 거래가 일어나는 전통적 B2B 시장이었다. 대부분 EPC기업이 구매결정권을 쥐고 있어 중소업체도 일정수준의 품질만 갖추면 수익창출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리드패리티 달성 이후 이 시장은 지금의 가전제품처럼 소비자가 직접 브랜드와 품질을 따져 구매에 나서는 B2C(Business to Consumer) 형태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브랜드 인지도와 신뢰성이 중요한 구매요건이 된다는 의미다.

태양광주택 보급이 활성화돼 있는 일본에서는 이미 이런식의 구매관행이 정착하고 있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사용할 제품으로 값이 저렴한 외산보다 자국산 대기업 태양광 모듈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전 세계 가전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최종소비자를 상대해 본 우리로서는 귀가 솔깃한 이야기다.

이런 흐름을 간파한 태양광 기업들은 이미 자사 브랜드를 대중에 알리기에 열심이다. 중국의 잉리는 지난번 월드컵 때 공식후원사로 나섰고, 캐나디안솔라(CSI)는 독일 프로축구와 미국 프로야구 스폰서가 됐다. 

삼성과 LG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진다고 판단한 한화는 '한화 솔라' 브랜드 홍보를 위해 이탈리아 프로축구팀을 후원하고 최근 '한화가 태양광에너지로 내일을 준비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줄기차게 내보내고 있다.

한 태양광 전문가는 "결국 이 시장도 대기업들만의 전쟁터가 될 것"이라며 "관건은 그때까지 누가 버텨내느냐, 얼마나 그 시장을 치밀하게 준비하느냐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중견기업이라면 대기업이 넘볼 수 없는 '경제적 해자(Economic Moats)'를 구축하는 것도 지상과제다.

태양광EPS 전문기업인 SDN은 경쟁사들이 내수시장에서 출혈경쟁을 벌일 때 홀로 해외발전소 개발에 나서 이역만리 유럽땅에 수십MW 규모의 발전소를 세우고 값진 노하우를 쌓았다. 언제, 어떤 기업과 맞붙어도 발전소 설계와 건설, 운영면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게 이 기업만의 배짱이자 해자(垓子)다. 

역설적으로 '태양광 2.0 시대'까지는 그리 시간이 많지 않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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