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ㆍ지자체ㆍ시민단체 의견 분분

자발적인 소비자에게 일반 전기료보다 비싼 값을 매겨 차액을 신재생에너지 재원으로 사용하는 '그린프라이싱(Green Pricing)' 제도의 국내 도입을 앞두고 주도적 역할을 떠맡게 될 공공기관ㆍ해당지자체ㆍ시민단체의 의견이 분분하다.

 

소비자로부터 직접 요금을 받아내야 할 한국전력은 상부기관인 산업자원부가 지나치게 제도 도입을 서두르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마치 앞잡이가 된 기분이라며 머쓱해하고 있다. 한전은 외부적으로 "전체적인 제도 도입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부작용을 막으려면 1~2년의 유예기간을 둬야 한다"는 유보적 입장을 나타냈다.

 

그린프라이싱 제도를 전담하게 될 한국전력의 한 관계자는 20일 "제도 도입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라며 "충분한 검토시간이 필요한데 정부는 한전이 알아서 홍보하고, 징수하고, 사용하라는 식이어서 잘못하면 총알받이가 될 판"이라고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정부는 한전이 요금 1%를 걷도록 약관을 개정하고, 이렇게 조성된 기금은 산자부와 한전이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집행하도록 하자는 주장을 펼 것으로 보인다. 제도를 도입한 산자부는 뒷짐을 지고 정작 나서는 '악역'은 한전의 몫이란 얘기다.

 

그는 "결국은 국민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이 선행돼야 할 일이지 약관만 개정해서 될 일이냐"고 반문하며 "형식은 자발적이란 단서가 달렸지만 내용은 반강제적이나 다름없어 공공기관이 어느 정도 수용할 지 장담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홍보와 사회적 공감대로 당위성을 확보한 뒤에 어떤 요금 부과형태가 좋을지 용역 안을 진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며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한전의 전체적인 입장"이라고 밝혔다.

 

안남성 전력연구원 전력경영연구센터장 역시 한전의 '시기상조론'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책을 밀어붙이기 전에 법적 문제를 선결하고 예상 가능한 정책부작용을 미연에 막아야 제도의 본래 취지를 십분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안센터장은 "한전이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금형태를 적용하려면 전기사업법이 바뀌어야 하고, 전력 요금당 부과시키는 방안은 약관자체를 바꿔야 한다"며 "결국 첫 번째 문제는 기금형태냐, 약관형태냐 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안센터장의 설명의 의하면 요금이란 것은 실수요자가 혜택을 보고 내는 것인데 그린프라이싱 제도는 기부금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해서 한전이 대략 100억원의 기금을 모아도 아직 사용처에 대한 계획이 불분명하거나 밑그림이 없다는 게 안센터장의 지적이다.

 

그는 또 "정부가 MOU를 맺고 사용처를 구하자고 했지만 실제적으론 교육투자에 쓰자는 정도의 추상적 계획밖에 나오지 않고 있다"며 "세밀한 조사로 예상되는 부작용을 확보해야 근본취지를 살릴 수 있으므로 한전 측에선 1년 이상 도입을 미루자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이 밖에 한전 관계자는 용량에 따른 요금제 전환이 산자부와 한전이 애를 먹고 있는 중요한 사안인데 갑자기 그린프라이싱 제도가 등장하면서 자칫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고 전했다. 또 발전차액제도로 이미 지원되고 있는 신재생에너지 분야가 중복 지원될 수 있다는 우려의 시각을 나태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린프라이싱제 도입에 따라 실제 인상된 요금을 내게 될 공공기관의 입장은 어떨까. 경기도 모 시청의 반응을 살펴봤다. ○○시는 현재 월 1200만~1600만원 정도의 전기요금을 부담하고 있다. 그린프라이싱 제도가 적용될 경우 해당 시가 추가로 부담해야 할 요금은 12만~16만원이다.

 

전체 요금에 비해 그리 많은 금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담당자의 반응은 의외로 싸늘했다. 아무리 공공기관이지만 사용하지도 않은 요금을 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이다.

이 시의 회계과 김모 담당은 "정부가 추진하는 일을 막을 순 없겠지만 아무리 소액이더라도 사용도 하지 않은 것에 요금을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혜택을 주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에 의하면 ○○시는 시민회관 등에 신재생 급탕시설을 설치하는 등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활성화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고, 심지어 대기전력을 차단하기 위해 큰 돈을 들여 절전형 시스템을 설치했지만 상급기관은 실적을 공람하는 형식적 수준에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부 기관이야 늘 정부정책에 군소리 없이 따라야 맞겠지만 갈수록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며 "참여하라는 지침이 내려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일선 공공기관 입장에선 결국 시민이 낸 돈을 써야하는 입장이니 그리 반길 일이 아니다"라고 푸념했다.

 

한편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시민단체는 "정부가 그린프라이싱 제도의 본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성급한 정책 추진에 우려의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훈 환경연합 정책실장은 "신재생에너지는 정부가 주도해서 시장을 창출하고 있는 형편으로 시장에서 생존할 능력이 없다"고 전제한 뒤 "중요한 것은 지금 비록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실장은 "해외의 적용 사례를 살펴보면 기금자체보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며 "이를 정부 정책을 밀고 나가는 힘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은 구속적이고 임의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공공기관부터 적용하게 되더라도 그 돈은 시민이 부담하게 되는 꼴이며, 시민은 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면서 "현재의 상태라면 시민의 의식도 높이지 못하고 본래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처럼 그린프라이싱 제도에 공공기관과 시민단체마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21일 공청회를 열어 내년도 강행 의사를 분명히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일각에선 "정부가 단기적인 정책의 실적을 높이기 위해 꼼수를 쓰고 있다"는 얘기가 무성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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