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의견 종합 "충분한 논의 후 구체적 적시 필요"

 지난달 30일 한국관광공사 국제회의실. 에너지관련법에 대한 법조계 민간연구단체인 사단법인 한국에너지법연구소가 주최한 정기 발표회가 한창이다. 이 자리에서 패널로 나선 지용희 서강대 경영대학원 원장은 에너지안보를 주제로 말을 꺼내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랜 해외생활로 에너지 절약습관이 몸에 밴 그에게 한겨울을 반팔차림으로 나는 한국인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는 “에너지 빈국으로 너무 태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정부와 국민은) 에너지안보를 잊은 듯했다”고 일침을 놓았다.

 

◆에너지안보 불감증 심각=국가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안전을 유지하는 일을 우리는 ‘안보’로 정의한다. 그래서 안보라는 법률용어엔 외교ㆍ통일ㆍ국가 등의 말머리가 따라붙게 마련이다. 최근 광의적 개념의 외교안보 못지않게 에너지안보가 세인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다.
에너지수급 불안은 경제 혼란을 불러 한 국가의 안정을 뒤흔들고 이는 결국 국경을 넘어선 분쟁의 불씨로 번져왔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모든 국제 전쟁은 에너지 문제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문가의 해석도 나오고 있다.
에너지를 둘러싼 국제관계야말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냉혹한 실리의 세계란 분석이다. 즉 에너지안보를 위협하는 국가는 곧 적으로 간주하고, 안보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국가는 가장 극진한 대접이 필요한 우방이란 것이다.
이미 이념을 중심으로 양분됐던 세계의 패권도 에너지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제는 안보문제를 논하면서 에너지를 유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근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 에너지안보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하고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에너지안보에 대한 헌법적 정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헌법적 정의 필요성 대두=우리나라 헌법전문은 안보에 대한 법적 근거를 대통령령으로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76조 1항을 살펴보면 “대통령은 내우ㆍ외환ㆍ천재ㆍ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ㆍ경제상의 위기에 있어서 (중략)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ㆍ경제상의 처분을 하거나 이에 관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담은 제2장 제34조 6항의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조항과 궤를 함께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문제는 ‘내우ㆍ외환 등의 중대한 재정ㆍ경제상의 위기’에 에너지안보 개념이 포함돼 있느냐 하는 사항이다. 일각의 주장은 헌법에서 위기로 정의하고 있는 부문에 에너지안보의 개념이 보다 분명히 녹아 들어가야 한다는 주문이다.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현행 헌법의 안보개념은 실제적이고 가공할만한 에너지 현안을 대처하기에 막연한 감이 없지 않다는 우려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대체로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시기상조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헌법학자 “구체적 적시 불필요”=일단 헌법학자들은 헌법이 갖는 형식적 의미와 실질적 의미의 차이를 들어 “구태여 포함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에너지안보가 국가의 존립을 좌우하는 현안으로 부상했더라도 한 나라의 통치조직과 기본권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헌법에 에너지라는 구체적 사안까지 적시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다.
국내 대표 헌법학자로 꼽히는 정종섭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부학장은 “에너지뿐만 아니라 안보를 위협하는 모든 사안이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사안이므로 (에너지는) 당연히 안보개념에 포함됐다고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정학장은 “헌법은 시대의 가치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데 모든 사안을 붙일 수도 (헌법에 규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라며 “현재의 시대 공동체 유지를 위해 아무리 에너지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안보=에너지’란 등식을 헌법 조항에 명시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헌법이 추상적이며 포괄적인 용어를 쓰는 이유가 다 이런 (다의적 해석과 적용할 수 있는) 점에 있다”면서 “결국 헌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을 통해 읽어야 하고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헌법은 모든 법률의 근간이 되고 시대변화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세부적 내용까지 담지 않는다는 법률적 원론을 법학자 입장에서 강조한 셈이다.

 

◆안보전문가 “논의의 장부터 마련”=그러나 안보문제를 다루는 학계의 반응은 이보다 진일보해 있다. 에너지 문제가 나라의 존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기에 헌법적 정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는 의견이다. 다만 에너지안보에 대한 개념정리와 중추적 정책기구조차 부재한 상황에서 ‘헌법적 정의’는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일 뿐이란 회의적 시각이다. 
일찍이 에너지원의 안정적 확보가 결국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주지해 온 김재두 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의견에는 공감하고 동조하지만 현실을 2~3단계 뛰어넘은, 앞서나가는 얘기”라고 밝혔다. 그는 이에 앞서 “실질적인 안보전문가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안보적 차원에서 논의했다는 흔적이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위원은 “안보에 대한 개념 정립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같은 논의가 진행되는 것은 무리가 있다”면서 “취지에는 공감하고 동조하지만 에너지안보에 대한 논의의 장부터 마련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에너지문제를 안보차원에서 검토하는 기관이나 기구가 없는 상황이고 에너지 안보에 대한 강좌가 개설된 대학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며 “(그러한) 기초 인프라도 구축돼 있지 않은 현실에서 헌법적 정의 수준을 논하는 것은 야만인에게 문명을 강요하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김위원은 “세계는 지금 에너지안보가 시장논리에서 국가안보 차원의 논리로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의 군사적 특수상황은 세계 조류에 부합하는 국가전략을 구사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고 에너지안보는 위협받을 수 있는 중대한 실체란 사실을 알리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일의 헌법전문=그렇다면 에너지에 관한 한 초법적 정책기조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독일은 어떻게 이 문제를 법적 테두리 안에서 수용하고 있는 걸까. 통일독일 헌법의 전문을 입수해 에너지안보에 관한 헌법적 규정을 살펴보자.
독일은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에너지안보를 구현토록 관련조항을 마련해 놓고 있다. 통일 독일의 정치, 행정, 법, 외교를 포괄적으로 담고 있는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통일독일 헌법)은 우리의 헌법보다 에너지안보에 한참 더 근접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독일 헌법 제87c조는 ‘핵에너지의 생산과 이용에 관한 규정’을 적시하고 있다. 헌법전문에 ‘핵에너지’란 문구가 분명히 명시돼 있는 것이다. 독일은 주 정부가 경합적 입법사항으로 제시된 핵문제에 대해 연방참의원의 동의를 얻어 법률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 제74조 11a항을 전제해 보면 “평화적 목적을 위한 핵에너지의 생산과 이용, 위 목적을 위한 시설의 설치와 운영, 핵에너지의 자유화 또는 전리 방사선에 의해서 야기되는 위험의 방지, 방사능 물질의 제거”라고 나와 있다.
가장 높은 신재생에너지 보급률을 자랑하며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책을 구가하고 있는 독일도 지속가능한 안보 측면에서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법적 근거를 헌법으로 명문화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가 원자력법을 통해 안전위주의 소극적 법적용을 시행하고 있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동휘 외교안보연구원 경제통상연구부 교수는 에너지안보에 관한 그의 보고서(2005)에서 “지금 세계 각국은 에너지안보를 전략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고서에서 그는 “에너지안보는 경제안보의 주요 구성요소의 하나로 한 나라의 경제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데 요구되는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현재는 정치적 관점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에너지안보는 국가존립 및 번영에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하는 광의의 기능까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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