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공급사업자 대상 에너지효율향상의무화제도(EERS) 재추진
의무량 부여 후 실적 따라 혜택, 또는 패널티 부과

[이투뉴스] 공급 위주의 에너지정책을 수요관리로 전환하겠다고 공언한 정부가 에너지공급사업자에 연도별 에너지절감 목표를 부여한 뒤 이행여부에 따라 인센티브나 페널티를 부과하는 ‘에너지효율향상의무화제도(EERS. Energy Efficiency Resource Standards)’ 도입을 추진중이다.

에너지소비주체인 기업에 고효율기기 보급을 지원하거나 효율개선 자금을 융자해주는 기존 제도만으론 국가 효율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보고, 공급사업자에 직접 절감(효율향상) 의무를 부여해 수요증가에 대응하고 실질적인 고효율화를 꾀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제도가 본격 추진되면 대표적 에너지공급사업자인 한전과 가스공사, 지역난방공사는 최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에너지효율향상 프로그램을 추진하거나 에너지절약전문기업(ESCO)에 이를 위탁해 정부가 정한 효율향상 의무량을 채워야 한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미달분만큼 패널티도 물어야 한다.

정부 차원의 첫 고강도 수요관리 정책이 될 EERS의 매커니즘과 앞서 이 제도를 도입한 해외사례를 살펴보고, 국내 시행 기대효과와 에너지산업 영향, 한전 등 의무사업자들에 미칠 영향 등을 조명해 봤다. 정부는  관련 제도 정비에 나서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EERS를 시범 도입한다는 구상이다.

◆ 에너지효율화 EERS의 차이점 = 지금까지 정부는 소비주체인 기업을 대상으로 효율화 사업을 추진해 왔다. 전력산업기반기금을 이용해 고효율 변압기·LED조명·인버터 등 고효율기기 보급을 장려하고, 공정개선 원하는 기업에 저금리 자금을 융자해주는 ESCO제도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전기료를 포함한 에너지요금 현실화가 지연되면서 이런 인센티브 제도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당장 실적에 급급한 기업들은 분명한 비용절감 효과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에 걸쳐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식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소비억제를 금기 시하던 정부의 책임도 크다.    

EERS는 이런 맥락에서 기존 정책과 성격이 다르다. 소비주체 절감유도 대신 공급사업자에 절감 목표를 부여한다. 현재 거론되는 의무대상자는 전력부문에선 한전과 구역전기사업자, 가스부문에선 가스공사와 도시가스사, 열 부문에선 지역난방공사와 민간 집단사업자 등이다.

다만 시행초기에는 한전, 가스공사 및 대기업 도시가스사, 지역난방공사만을 의무이행 대상으로 하고, 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된 이후 구역전기사업자와 중소 도시가스사, 민간 집단에너지 사업자로 확대하는 방안이 유력 시 되고 있다.

정부가 이들 공급자의 의무 달성을 강제하는 것도 기존 정책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다. 기존 효율향상 사업이 지원정책이라면, 목표량을 제시하고 이행여부에 따라 인센티브나 패널티를 주는 EERS는 규제정책에 가깝다. 지금까지의 수요관리 시책 중 가장 강도가 높다.

이창호 전기연구원 전력산업연구센터장은 "정부가 효율향상사업 등의 수요관리를 지속하고 있으나 실적이 미흡해 현재의 프로그램으로는 목표 달성에 한계가 있다"면서 "EERS는 정부가 에너지를 공적 한정재화로 보고 추진하는 국가 차원에 에너지효율화 정책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EERS 목표량 설정 및 운영은 어떻게 = 정부는 2008년 '제4차 에너지이용합리화 기본계획'에 EERS 추진계획을 반영한 이후 2010년 에너지경제연구원에 실행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해 2012년 보고서를 제출받았다. 또 지난해 중순 공급사업자를 대상으로 간담회도 가졌다.

에경연의 보고서에 따르면, 공급의무자는 판매량을 기준으로 3년마다 인상된 절감목표(의무량)를 부여받게 된다. 전력의 경우 초기(1단계) 3년은 매년 BAU(전망치) 대비 0.25%를, 중기 3년은 0.5%를, 후기 3년은 0.8%를 각각 감축해야 한다. (용역안 시나리오 2 기준)

다만 사업자별 의무량은 수요증가율이 높은 전력·가스는 다소 높게, 수요관리기술 적용에 한계가 있는 지역난방은 이보다 낮게 차등 부과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제도 운영은 기존 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RPS)와 유사한 개념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정부가 의무량을 확정에 에너지공급사에 할당하면, 이들 사업자가 직접 에너지소비자의 효율개선 사업을 추진하거나 ESCO사업자와 대행계약을 체결해 이행하는 것도 허용된다.

이 과정에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의무사업자들은 ESCO사업자로부터 MWh, 또는 TOE 단위로 인증서(EEC)를 사들여 의무량을 채울 수도 있다. 만약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사업자는 미달성분만큼의 벌금(패널티)를 부과받고, 반대의 경우 세금감면 등의 혜택이 부여된다.

◆ 유럽 · 미국은 10여년전부터 이미 시행 = 유럽연합(EU) 주요회원국과 미국은 10여년전부터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효율향상을 위한 전략으로 EERS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보다 에너지수급 여건이 좋은 나라들이 더 적극적으로 수요관리 정책을 펴왔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적지 않다.

우선 영국은 2001년부터 전력·가스공급사를 대상으로 가정부문에서 연간수요의 1%를 감축토록 강제하고 있고, 프랑스는 2005년부터 모든 에너지사업자의 EERS를 의무화하고 있다. 프랑스는 2015년까지 연간 2%의 최종에너지를 절감하는 것이 목표인데, 현재까지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이탈리아는 2001년부터 14개 전력공급사업자와 61개 가스공급사에 EERS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들 사업자는 전체 에너지공급량의 80%를 책임지고 있다. 이탈리아는 2009년 목표량을 높이고 의무대상을 배전판매사업자까지 확대하는 등 강화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캘리포니아주, 뉴욕주를 비롯한 20여개주가 1999부터 2008년 사이 EERS를 시작했다. 주별 올해 목표절감량은 캘리포니아 0.6%, 뉴욕 2.0%, 메사추세츠 1.7% 등으로 상이하다. 시행유형도 캘리포니아주 등 대다수는 규제방식을, 네바다·펜실베니아·하와이주 등은 RPS와 연계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정경화 에경연 연구위원은 "산업계의 이중규제 방지를 위해 배출권거래제와 EERS 의무대상을 중복 지정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현재 고려되고 있는 한전, 가스공사, 한난 외에 최종소비자와 밀접하게 연관된 도시가스사업자 등을 대상에 포함시켜 정책 목표를 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공급사업자 부담 불구 사회편익 커 = 에너지공급사 입장에서 EERS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제도가 될 공산이 크다. 공급량을 늘려야 수익이 증대되는데, 에너지효율 향상은 장기적으로 전력, 가스, 열 등과 같은 에너지소비량을 감소시키는 것은 물론 EERS 이행과정에 비용부담이 추가될 수도 있다.

실제 공급사들은 이 때문에 2010년 이후 줄곧 제도시행에 강하게 반대해 왔다. 특히 에경연의 용역안에 의무대상자로 추가된 도시가스사들의 반발이 컸다. 2011년 9.15 정전사태로 정부가 다시 이 카드를 꺼냈을 때는 전력·가스 등 대부분의 의무대상자들이 제도 미흡을 명분으로 '시기상조' 여론몰이에 동참했다.

공급의무자인 한전의 내부보고서에 의하면, 초기 3년 0.25%, 중기 3년 0.5%, 후기 3년 0.8%를 매년 감축하는 정책이 내년부터 추진될 경우 한전은 일부 비용 감소에도 불구 2022년까지 3조6783억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이에 따른 전기료 인상요인은 연평균 0.55%로 추산된다.

분야별로는 효율향상 지원비로 5조3840억원이, 매출 손익 감소로 3조1579억원이 발생한다. 반면 피크전력 감소로 SMP가 하락해 구입전력비 2조6873억원이 절감되고, 온실가스 4800만톤이 감축돼 2조1763억원의 비용감소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당국은 공급의무사들의 이같은 투자비 보전 우려를 디커플링(Decoupling) 제도로 보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디커플링은 예상판매량을 기준으로 수익률을 미리 정해 판매량이 적을 때는 요금을 올리고 반대의 경우 요금을 내려 공급자의 손실을 막아주는 제도다.

EERS는 신규 신재생에너지 발전설비 투자에도 다소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제도 시행으로 전력도매가격(SMP)이 낮아지면 재생에너지 사업의 수익성도 동반하락하기 때문이다. 다만 에경연은 그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분석했다.

공급의무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EERS가 배출권거래제 등과 더불어 도입될 경우 국가 전체 편익은 생각보다 클 것이란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일단 같은량의 에너지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 1차 에너지 사용량이 감소하고, 이 과정에 고효율 산업이 부양돼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력산업연구센터가 내년부터 2024년까지 10년간 매년 0.5%의 의무량이 전력부문에 부과되는 상황을 가정해 추정한 총 절감량은 15만5800GWh이며, 이 기간 7400만톤의 CO₂가 절감되고 9조3000억원의 연료비가 절감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발전에서 9조원, 송변전에서 2조원의 설비투자를 줄일 수 있다.

이창호 센터장은 "공급량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방식의 우리 에너지정책은 지속가능하지도, 에너지빈국인 한국 현실에서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면서 "국가적 수요관리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된 정책이 추진될 수 있도록 정밀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 에너지공급자효율향상의무화제도(EERS) 추진 일지

  2008년  7월   정부, EERS 2010년부터 시행 계획 발표
             12월  '제4차 에너지이용합리화 기본계획에 반영
  2010년  4월  에너지경제연구원 정책·기술연구용역 추진
              6월  용역결과 일부 공개
              8월  도시가스사 대상 간담회 개최 (업계 반대)
  2011년 4월  에너지공급자 수요관리 심의위 개최
              9월 국제컨퍼런스 개최 (도입 재검토 여론)
  2013년 5월 공급사 대상 정책간담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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