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가능 사고위험 증대…경각심 실종

[이투뉴스] 1975년 노먼 라스무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팀은 미 원자력규제위원회가 의뢰한 '원자로 안전성에 관한 연구보고서(WASH-1400)'를 정부 측에 제출한다. 훗날 '라스무센 보고서'로 회자된 이 보고서에서 연구팀은 원자로가 노심융용(Melt down)으로 방사능을 소량 누출시킬 확률을 100만년에 한번으로, 같은 사고로 방사능이 대량 유출될 확률을 10억년에 한번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나온지 불과 4년만인 1979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쓰리마일섬(TMI) 원전에선 냉각수 순환펌프 고장-보조급수기 미작동-운전원 실수에 의한 긴급노심냉각장치 작동 중단으로 이어지는 고장·실수로 실제 노심융용 사고가 일어난다. 또 TMI 사고로부터 7년이 흐른 1986년 구소련(現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에선 안전시험을 벌이던 운전원들의 오조작으로 원자로가 폭발해 막대한 양의 방사능이 누출되고 수천~수만명의 피해자(사망자 포함)가 발생했다.

2011년 쓰나미로 침수돼 결국 원자로 노심융용과 폭발사고로 이어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까지 포함하면, 인류는 100만년에 한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노심융용을 세번이나 겪은 셈이며 10억년에 한번꼴이란 방사능 유출사고를 두번이나 당한 불운의 주인공이 된다. 이를 근거로 학계는 IAEA 기준 7등급 중대사고의 실제 발생 확률을 10억년에 1이 아닌 7000분의 1로 재산정하고 있다.

물론 중대사고 위험을 확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과거 통계를 근거로 미래사고를 기정사실화해야 한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다만 반복적으로 현실화된 일련의 중대사고를 놓고 볼 때 사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원자력계의 주장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그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원자력계 안팎에선 과거 중대사고와 달리 원인을 예측하기 어려운 새로운 유형의 사고발생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란데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지금까지의 중대사고가 예측 가능한 범위안의 것이었다면, 향후 사고는 좀 더 다양하고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서 촉발될 것이라는데 무게를 실고 있다.

국내 원전 발전소장을 지낸 노윤래 전 한전원자력연료 사장은 최근 <원자력산업>誌에 기고한 '사고에 대한 인지심리학적 분석'이란 제목의 글에서 예상치 못한 고장의 상호작용으로 위험도가 증가하는 '상호 작용적 복잡성'과 그로 인한 시스템 사고에 대해 원자력계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 전 사장에 따르면 사고는 설계, 설비, 절차, 운용자, 원료, 환경 등 다발적 고장의 결과로 발생한다. 특히 원전처럼 많은 요소로 구성된 시스템에서는 예상치 못한 두 가지 이상의 고장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대형 사고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노 전 사장은 "어떤 부품이나 장치가 두가지 기능을 하도록 설계되면 그 부품이나 장치에 고장이 일어날 경우 해당 모드를 공유하는 모든 기능에 문제가 발생되는 '공동모드 고장'에 대한 우려가 있다"며 "더 큰 문제는 이런 고장을 줄이려고 설계자들이 추가로 안전장치나 부품을 설계에 반영해 시스템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결국 상호 작용적 복잡성을 일으켜 위험도를 더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술적 측면의 위험 증가와 더불어  원자력 산업계 내부에 깊숙히 자리잡은 폐쇄적 집단 심리와 고장정지율로 원전 안전성과 신뢰성을 어필하려는 사업자의 행태도 원전 안전성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광식 원자력안전기술원 책임연구원은 후쿠시마 사고와 관련 ▶권위로의 도전을 용인하지 않는 일본의 문화적 특성 ▶조직 내에 굳건히 자리잡은 은폐와 축소 및 조작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느니 안전할 것이라며 '어떤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상상을 중단한 것 ▶우리 원전이 세계 최고로 안전하다는 환상과 신화 및 '중대사고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 등을 내부적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우리 원전은 안전하다는 생각을 강요하면 그에 대한 우려를 표명할 수 없게 만드는 집단 동조의 압력, 안전과 관련한 불길한 상황전개를 의도적으로 못 본 채 하는 의도적 외면, 안전 관련 전조현상이 원전은 안전하다는 자신의 통념과 다를 때 그 불편을 합리화해 인지 부조화 현상을 해소하려는 성향 등도 사고의 원인"이라며 "2012년 고리 1호기 소내전원 은폐사건에서도 이런요인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최 연구원은 "후쿠시마 사고 원인 조사는 공식적으로 끝난 것 같이 보이나 앞으로도 다양한 시각의 평가를 통해 예방 치유적 가치를 갖는 교훈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규제기관이나 사업자가 최근 사고나 사건에서 교훈을 충분히 얻었으며, 최선을 다해 잘하고 있다고 자기 합리화하고 자만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평균 이용률과 고장정지율(불시정지율)로 운영실적과 안전성을 홍보해 온 원전사업자의 행태도 문제라는 시각이다. 높은 이용률은 원전의 중대사고 확률이 낮다는 것을 전제한 무리한 운전의 결과일 수 있고, 낮은 불시정지율은 의도적으로 불시정지를 막아 기록을 달성하려는 좋지 않은 관행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

최 연구원은 "원전은 사소한 트러블이라도 일어날 경우 안전한 쪽으로 정지하게 돼 있어 불시정지가 안전하지 않은 징표라고만 볼 수 없는데 그동안 낮은 정지율로 안전성을 과시하다보니 이제와 '원전이 안전한 방향으로 간 것'이라 설명해도 국민과 언론이 믿지 않게 된 것"이라며 "이는 사업자 측이 정지건수가 낮은 것이 안전한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이를 홍보해 온 결과로 자업자득적인 측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이투뉴스 - 글로벌 녹색성장 미디어, 빠르고 알찬 에너지·경제·자원·환경 뉴스>

<ⓒ모바일 이투뉴스 - 실시간·인기·포토뉴스 제공 m.e2news.com>

저작권자 © 이투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