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의연하게 극복해야"
개인 사건 희화화 경평결과 상심 직원 다독여

▲ 조환익 한전 사장
[이투뉴스] "사람이 한평생 살다보면 접시물 같은 계곡에 빠져서 허둥거리기도 하고 작은 돌뿌리에 넘어졌는데도 크게 다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의연하게 극복해 나오느냐에 따라 인생 살맛이 가늠져지는 것 같습니다."

조환익 한전 사장<사진>이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와 복리후생 축소·폐지 노사합의로 의기소침해진 2만여명의 직원들을 다독였다. '계곡의 저주'란 제목으로 지난달 24일 전직원에 발송한 원고지 20여장 분량의 이메일을 통해서다.

지난해부터 조 사장은 소통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직접 작성한 장문의 편지글을 전직원 이메일로 발송해 왔다. 주기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통상 한 달에 한번 꼴이었으며, 개인적 경험이나 추억을 소재로 자연스럽게 글을 풀어나갔지만 CEO로서의 번뇌가 은연중에 묻어났다는 게 직원들의 전언이다.

특히 작년 7월 여름휴가를 앞두고 보낸 이메일에선 전력난으로 에어컨 한번 가동하지 못하고 무더위와 싸우는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 뒤, 글 말미에 간부들이 솔선수범해 휴가를 찾아 쓰도록 주문해 직원들의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조 사장은 당시 메일에 "제 경험상 여름에 휴가 안가고 일 더한다고 실적이 오르는 것이 아니더라. 몇년간 휴가 한번 안 갔다고 자랑하는 간부들이 조금도 존경스럽지 않다. 부하 직원들의 휴가를 잘라먹는 야만적인 짓을 하지 말기 바란다. 3대가 저주받을 겁니다"라고 적었다.  

통풍이 안돼 최고 34℃까지 치솟는 사무실에서 비지땀을 쏟던 직원들은 조 사장의 인간미 넘치는 편지를 읽고 환하게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지난달 24일에도 조 사장은 "여름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란 인삿말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 편지는 조 사장이 당일 사측과 전력전국전력노동조합이 11개 방만경영 개선대책 이행에 전격 합의한 이후 작성해 발송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이메일을 입수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오후 5시 30분께 발송된 메일의 내용은 이렇다.

때는 조 사장이 대학 1학년이던 8월 어느날. 고등학교 죽마고우 네명과 함께 동해 여행을 계획한 조 사장은 중앙선을 타고 강원도로 이동해 속초 민박집에서 여행 첫밤을 보낸 뒤 이튿날 설악산으로 향한다. 첫날은 신흥사를 거쳐 비선대로 이동하고, 이튿날은 울산바위를 오르기로 한 터였다. 

그런데 첫날 와선대 인근 작은 계곡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수영이 미숙했던 조 사장이 의지한 고무튜브의 바람이 빠져나가면서 "접시물 같은 곳에서 빠져 죽을 뻔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수영을 잘했던 친구들은 주위에 구조를 요청할 뿐 직접 나서지 못했다.

다행히 조 사장은 물 속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한 노인이 건넨 '지팡이 같은 것'을  붙잡고 가까스로 구출됐고, 이후에도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조 사장은 직접 물로 뛰어들지 않은 친구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쌓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들과 소원해진다.

물론 조 사장이 메일 제목으로 단 '계곡의 저주'는 당시 자신을 직접 구조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일종의 저주를 받아 사업에 실패하는 좋지 않은 말로를 걷고 있다고 희화화하기 위한 장치다. 

정작 자신의 경험을 빗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살다보면 접시물 같은 계곡에 빠져 허둥거리기도 하고",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냐",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의연하게 극복해 나오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앞서 한전은 지난달 18일 발표된 '2013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C등급의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C등급 이상 기관은 등급별 경영평가급 지급 대상에는 포함되나 한전의 경우 부채관리 대상기관이어서 그나마 50% 삭감된 성과급을 받게 된다.

조 사장은 이에 대해 "한전은 이번에 경영평가 C등급을 받는 계곡에 빠졌다. 우리가 작년에 얼마나 많은 성과를 냈고 고생을 했는지 우리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기대했는데 실망이 크고, 경영진들은 전 직원들께 머리 숙여 송구한 마음을 표시하고자 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다만 조 사장은 "이미 끝나버린 사안에서 남 탓할 것도 아니고 내년에는 금년 상황을 거울삼아 최고등급을 받도록 다같이 노력하자"며 직원들을 다독였다.

아울러 "어려운 상황임에도 방만경영 개선대책에 합의해주신 신동진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관계자 여러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며 같은날 방만경영 정상화 과제 조기이행을 합의한 노조 측에 사의를 표했다. 착잡한 심경 속에 이 메일을 열어 본 직원들은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지방 본부 A차장은 "처음에는 여행사고와 일련의 일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리송 했는데, 다시 글을 읽었보니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며 공감을 표했고, 본사 B간부는 "일회성이 아니라 편지로 지속적으로 소통하시는 사장님의 진심이 느껴져 좋았다. 내용이 곡해돼 해석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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