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 "단계적·점진적 논의, 실질적 경쟁효과 미지수"
한전 “현실적인 제약 감안 실현가능 대안 모색해야”

[이투뉴스] 2004년 배전분할 중단 이후 무기한 보류됐던 전력산업 구조개편 논의가 10년 만에 불씨를 되살리고 있다. 정부는 발전부문은 경쟁도입을 확대하고 판매부문은 한전 이외 사업자에게도 시장을 단계적으로 개방하는 내용의 전력 소매시장 개편안을 검토중이다. <본지 ‘발전은 경쟁 확대, 판매는 단계적 개방’ 기사 참조> 일찍이 한전 독점 도·소매 시장 경쟁도입을 주창해 온 시장경제학 입장에선 만시지탄이다.

일단 공기업 개혁, 규제 혁파를 경제혁신의 기치로 내건 박근혜 정부는 서슬 퍼런 '공기업 정상화' 정지작업을 거쳐 작심한 듯 전력산업을 수술대 위로 올려놓는 모양새다. 진단병명은 ‘방만경영으로 인한 비효율 및 독과점에 의한 경쟁 저해’이다. 공기업이 산업의 말초혈관까지 독점하는 현 구조로는 창조경제를 실현이나 에너지신산업 육성도 공염불이 될 수 있다는 문제인식이 깔려있다.

이와 관련 앞서 지난 9월 박 대통령은 한전에서 열린 에너지신산업 대토론회를 주재하면서 에너지산업의 새 패러다임으로 “시장으로, 미래로, 세계로”를 제시한 뒤 에너지시장에 대한 민간진입 규제 개혁을 강하게 주문했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은 최근 판매시장 개방 논의와 맞물려 “전력산업의 진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희망적인 발언”(신중린 건국대 교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전력산업연구회가 ‘전력산업 : 시장으로, 미래로, 세계로’를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는 전력산업계의 새 화두로 부상한 바로 이 판매경쟁 도입을 어떤 형태로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시장경제학 관점의 논의가 오갔다. 이 자리에서 학계 일부 인사는 “경쟁도입 효과를 충분히 달성하기 위한 포괄적·전면적 개방이 필요하다”며 소위 단계적·점진적 경쟁 도입안에 맞불을 놓기도 했다.

반면 시장의 유효경쟁을 위한 선결과제들을 열거하면서 일련의 변화는 소비자들의 수용성을 높이고 충격이 최소화 되는 방향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비등했다. 특히 판매시장 개방 논의의 당사자인 한전은 현실적 제약조건에 바탕을 둔 신중하고 점진적인 접근을 당부했다. 전력산업 후속 개편논의의 현주소와 쟁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연구회 발제와 발언을 축약 정리했다.

▲ 전력 판매시장 개방을 주제로 열린 전력산업연구회 세미나에서 주요패널들이 발언하고 있다.

윤원철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 “제한적, 부분적 판매경쟁은 한전과 신규사업자간 규모의 비대칭성으로 실질적 경쟁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판매경쟁구조의 조기정착 필요성과 한전 판매부문을 분리 및 분할 이전하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가격, 비가격 차별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99%를 (한전이) 다 갖고 있지 않은가. 점진적 경쟁안 역시 실질적으로 경쟁효과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판매경쟁을 왜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비자에게 사업자 선택하게 함으로써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하는 것이다. 왜 일시에 모든 소비자를 대상으로 고려 안 되느냐. 한전의 판매부문 분리는 판매경쟁을 위한 제도적 선결조건이다. 판매사업자와 발전사간 전력수급 장기계약이나 쌍무계약을 허가하고 발전 및 판매겸업을 허용하되 발전자회사 판매겸업은 제한해야 한다. 또 원자력이나 석탄 등에 대해 일정비중을 판매사에게 공급의무를 부여해줘야 한다. 전력산업 개혁을 지금 하지 못하면 미래세대가 원망할 것이다. 제대로 개혁됐을 때는 엄청난 혜택이 있을 것이다.”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 : “우리 전력산업은 독과점적 시장구조와 경직적인 저에너지가격 체계를 갖고 있다. 현 상태에서 경쟁도입은 전력가격 인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현재 가격은 생산자잉여 축소와 순손실을 대가로 얻은 결과다. 당장 가격이 오르면 아무리 장기적 효과가 좋아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국민들의 시계(time horizon)는 그리 길지 않다. 바로 이게 경쟁도입 반대 논리의 핵심이다. 그런 면에서 시장가격 현실화가 선행돼야 한다. 원자력 위험비용 등을 반영해 상대가격 현실화하지 않으면 미래로 나아가기 어렵다. 현재처럼 공기업 적자를 담보로 가격을 낮게 규제하는 것이 과연 공익에 부합하는가. 최소한 적자가 해소되는 정도의 가격이 형성된 후에 경쟁을 도입해야 독점 공기업의 비효율이 제거되는 효과가 가격인하로 체감될 수 있다.”

손양훈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 : “(한전·가스공사 비중이 절대적인 에너지수급 현황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띄워놓고) 근원적으로 우리 에너지시장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보여주는 화면이다. 말하자면 혈관은 있는데 동맥경화 걸려있는 상태다. 원료 도입해서 생산, 판매하는 전 과정이 관제가격에 의해 움직인다. 물건이 나오면 가격이 움직여야 하는데, 가스공사에서 발전사로 유통되는 과정에 문제 있다 보니 여름에 가스공사 탱크가 85%가 차 있어도 안 쓴다. 관제가격 문제는 경쟁이 없고, 가격은 낮은 것이고 공기업 부채는 누적되는 거다. 한전은 부채가 105조원, 가스공사는 부채율이 400%다. 이건 뭔가 문제가 있다. 근원적인 문제는 여전히 이처럼 시장이 막혀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시장이 움직여서 그때그때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자원이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가격으로 가기 때문에 공급과 수요의 불일치가 일어난다. 또 모든 에너지사업자가 어려움에 처한다.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방식으로 에너지시장을 움직일 방법을 찾지 못하면 우리에게 제기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태규 전기위원회 위원장 : “우리 전력산업은 1인당 2kW의 설비를 보유할 만큼 굉장히 선진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초고압 송전망도 우리 기술로 확충했고, EMS의 국산화도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명과 암이 될 수 있다. 전력산업에 환경변화가 전력인프라의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일단은 갖춰진 초고압 송전설비를 잘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력망의 유연성을 제고하려면 현재의 전력 수송방식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구성방식을 다양화하고 제어가능성을 제고해야 한다. 시장측면에서 보면 거버넌스 체계의 문제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규제기능을 정부에서 별도 독립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정책과 규제, 감독기능을 분리하되 전력시장 감시기능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전력시장과 전력망은 기본적으로 공급위주 정책을 시장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송전망 이용요금 제도의 시행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수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 “발전부문쪽에선 용량시장 도입이 급선무다. DR시장 개선과 활성화 측면에서도 그렇다. 송전망에 대해선 한전이 어려우니 다양한 이해관계자 참여 쪽으로 가야한다고 본다. 전력산업의 ‘미래로’는 제도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가장 중요한데, 그러려면 정책 당국의 전문성 확보가 선결돼야 한다. 판매시장 개혁 발표내용에 공감하는 바는 적지 않다. 하지만 판매경쟁의 목표나 효과에 대한 인식을 전체 전력산업으로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판매부문은 원가에서 2~3% 밖에 안되지만 경쟁이 도입되면 발전은 물론 송배전부문까지 투자와 운영의 효율성이 제고된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지 계량화하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소매경쟁은 편익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시장에서 실질적 효과가 관찰되기 전에 즉각적인 비용을 유발하는 구조분리는 비합리적일 수 있다. 판매경쟁 도입에 대한 반대여론이 유의하게 존재하는 가운데 이를 극복하려면 단계적 경쟁을 통해 성공사례를 만들어 소비자가 스스로 경쟁도입을 유도하도록 하는 게 유효한 전략이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 “대통령은 공공부문 중심 에너지산업을 시장을 중심으로 전환하고 현재 수급논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보고 나가자고 했다. 그런데 에너지신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산업부는 법령에 규정된 사업자 외에 스마트그리드를 활용한 새로운 사업자를 모두 자동적으로 지위를 인정하겠다고 발표하고는 ‘발전, 송전, 배전, 판매, 구역전기는 제외’라고 한다. 농구골대 밑에 서 있으면서 기회를 동등하게 주겠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수비적이다. 한전과 발전자회사도 정부가 좀 편하게 해줘야 한다. 경영 자율성을 확대해 민간과 공정한 환경을 확보해 주고 유상증자로 부채문제 풀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력산업 전체가 위험해진다. 다만 발전부문의 인위적 통폐합은 혼란을 자초할 것이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점검하고 중점 추진할 과제를 선정하면서 한전의 민간 발전과 배전사업 기회 차단을 꼽았다. 과거 구조개편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경제기획원이 먼저 논의하니까 통상부가 안 움직이다가 주도권을 놓치게 되니까 뒤늦게 구조개편 검토하지 않았나. 대통령까지 모두가 전력산업 개혁 얘기하는데 주무부처가 오랫동안 침묵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산업부가 응답할 때다.

조영탁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 : “정면돌파하자는 주장, 우회하자는 주장 모두 다 나름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전력산업 구조개편 자체가 지속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발전부문에선 발전설비간 불공정 문제 해결해야 한다. 발전이 경쟁이라지만 아니다. 원전과 석탄 우대하는 건 기울어진 것이다. 제대로 된 외부비용 반영해 장기적으로 공정한 경쟁여건 만들어주는 게 국가의 역할이다. 도매시장도 지금 CBP시장에서 물량입찰을 가격입찰로 해본다던지 개선할 여지가 있다. 베스팅컨트렉트(VC)는 소매요금 규제수단으로 세밀화 된 보정계수에 불과하다. 다른 방식으로 한전과 발전사업자의 독립적인 시장거래 형태로 만들어줘야 한다. 송전문제는 지역신호, 즉 가격에 대한 지역신호를 줘야 한다. 발전사업자에 부과되지 않는 송전요금을 부과하면 된다. 정부의 의지가 있으면 가능하다. 학습효과도 중요하다. 국민들에게 요금이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걸 학습해주는 것도 중간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소매요금은 독립적인 가격위원회 만들어 요금산정의 준칙에 따라 산정되도록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현빈 한전 전력시장처 전력거래실장(제안 발언) : “먼저 판매개방정책은 점진적으로 추진돼야 할 것 같다. 국민 생활에 바로 직결되는 문제라 과거 2000년대 발전분할 때와는 다르다. 당시엔 한전이란 사업자가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어 시장내 새로운 시도나 실험, 실패에 따른 부작용이 국민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만약 판매경쟁이 급속히 도입될 경우 그 부작용이 바로 국민에게 전가될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단번에 전면 개방을 한 적은 없다. 제일 짧은 프랑스가 7년, 교과서라는 영국 9년, 이걸 다 보고 따라간 일본이 16년 걸쳐 추진중이다. 아울러 전력시장 개혁, 그 방향성은 반드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국민이나 국가 경제편익에 증진되는 방향이 돼야 한다. 단순히 판매경쟁 촉진을 위해 신규 사업자에게 각종 우대정책을 무리하게 편다면 새로운 가치창출 없이 서민증세를 통한 대기업 특혜시비를 일으킬 수 있다. 현재 한전은 신기술 융합, 전력과 ICT 융합을 통한 새로운 신기술과 신시장 확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과거 구조개편 패러다임이 아닌 신기술 융복합 시장을 만들어가는 관점에서 봐 달라. 15년 전에는 우리가 경험이 없어 25년전 영국 교과서 모델 도입해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14년간의 경험이 있다. 교과서적 모델 구현하기 위해 선결과제 제시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조건 인정하고 그 조건하에서 전력분야에서 실현가능한 대안 모색하는데 연구역량을 모아주시길 당부 드린다.

이승훈 녹색성장위원회 위원장 : “전기요금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원가회수가 안 된다. 그 다음은 전력을 효율적으로 써야하는데 그걸 소비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전기가 남은면 요금이 내려가고, 모자라면 오르게 돼 있다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경쟁을 도입하자는 건 그걸 말하는 거다. 요금을 올리지 않으면 한전은 적자다. 그런데 올리지 않으면 다른 사업자가 못 들어온다. 한전은 그것이 고민일 것이다. 이제 그런 고민을 그만하고 전력을 소비자들이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유도해야 한다. 소비자 시각에서 보면 비쌀 땐 안쓰고 쌀 땐 쓸 수 있어 전체적으로 요금이 오르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급속한 경쟁도입은 문제가 있다. 충격을 완화해 가면서 해야 한다. 또 하나는 민간과 공공부문이 협력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현재는 한전이 주도한다고 하는데, 혁신은 혁신적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주도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앞으로 한전은 할 일이 굉장히 많다. 민간사업자 일을 막지 않아도 많다.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하지 마라. 지금 현재는 변화하는 시기다. 분명한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전력산업 체제로는 새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 패널토의 장면

<ⓒ이투뉴스 - 글로벌 녹색성장 미디어, 빠르고 알찬 에너지·경제·자원·환경 뉴스>

<ⓒ모바일 이투뉴스 - 실시간·인기·포토뉴스 제공 m.e2news.com>

저작권자 © 이투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