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광업史 100年, 찬란한 빛과 어둠의 그림자
[창간특집] 광업史 100年, 찬란한 빛과 어둠의 그림자
  • 이윤애 기자
  • 승인 2015.04.2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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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사단법인 조선광업회와 지질조사소 설립으로 시작
금속광, 1950년대 수출품목서 이제는 90% 이상 해외 의존
100년의 역사 기록 남겨 연구자료 및 광업발전 밑거름 기대


▲ 강원도 영월군에서 옛 탄광길을 개발한 예밀1리와 주문1리를 잇는 '산꼬라데이길'에 위치한 광부 모형.
[이투뉴스] 광업은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1인당 국민소득 60달러의 최빈국에서 출발해 무역규모 1조 달러 달성과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대한 공헌을 한 산업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경제자립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며, 수출을 목적으로 지하자원을 본격적으로 개발했다. 1950년대 텅스텐과 흑연, 고령토, 무연탄 등의 지하자원은 전체 수출에서 70% 넘게 담당하며 외화획득과 국가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0~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석탄이 산업의 핵심연료로 주목받으면서 국가 산업화에 기여했고, 무연탄은 혹한기 서민들의 난방 연료로 사용됐다. 이후 고도성장기 아파트와 교량, 고속도로 등 각종 인프라와 제철, 자동차, 조선 등 주력 산업도 매장량이 풍부한 석회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 광업역사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구성
이같은 광업의 역사가 100여년이 흘렀다. 당시 업계는 새로운 백년의 광업은 어디를 지행해야 할 지 고민하며 2012년 6월 한국광업협회와 광해관리공단, 광물자원공사 등 유관기관ㆍ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한국광업백년사'를 발간했다.

김태수 전 광업협회장은 발간사를 통해 "세계적인 자원파동이 올 때마다 후회했던 지난 날을 거울삼아 진정한 광업인이 북한 땅과 세계 각국을 누비며 한국의 자원문제를 풀어나가는 날을 기대한다"며 "한국광업백년사가 광업인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는 기념비가 되고, 학계와 정책 당국의 연구 자료가 돼 향후 광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광업계는 이와 함께 오는 2018년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을 준비를 시작했다. 광업협회는 올해 광업계 원로와 현역 등으로 구성된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광업역사 100주년을 새롭게 쓰려고 한다. 협회의 역사는 1918년 사단법인 조선광업회의 설립으로 시작됐다. 1949년 6월 대한광업회로 개칭 후, 다음달인 7월 대한석탄협회가 분리됐다. 2001년 3월 현재의 협회명인 한국광업협회가 됐다.

▲ 강원도 태백 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광부들이 갱내에 입갱하고 있는 모습.

◆'국가경제 발전 기틀'서 '합리화 대상' 되기까지
최초로 광업권제도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건 일제시대다. 일본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광물가격이 상승하자 광업 활성화를 꾀하기 위해 '조선광업령'과 시행규칙을 제정 공포하고 1916년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경성공업고등학교에 광산과를 최초로 설치했다. 1917년 광상조사를 완료하고, 당시 조선에 광물자원의 잠재력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자 이듬해인 1918년 지질조사소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자원조사를 시작했다.

지질조사소는 현재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초기 기관명으로, 광복 후인 1946년 중앙지질광산연구소로 개칭 후 2001년 현재의 기관명을 갖게됐다. 국내에 있는 연구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게된 연구원은 설립 초기에는 광물자원 탐사와 개발에만 주력했다. 하지만 현재는 국토지질, 광물자원, 석유해저, 지구환경 등 4개의 거대한 연구 영역을 중심으로 차세대 에너지 개발, 행성지질, 녹색기술 개발 등 미래 기술도 연구한다.

한편 일제시대에는 금광 개발을 중심으로 활동이 전개됐다. 일제 말기 전쟁물자 동원을 위해 금 이외에 전략광종으로 텅스텐과 몰리브덴, 철 등을 개발하기 이전까지 광업은 바로 금광업을 지칭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정선에는 현재 일제 때 활발하게 채취했던 금광 중 화암동굴이 보존돼, 관광지로 개방되고 있다. 천공기, 굴착기 등 채광에 필요한 장비가 전무해 대부분이 수작업으로 진행된 모습과 벽에서 금을 채광하며 6여미터 높이까지 굴을 파올라간 현장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광복 후 수립된 정부는 산업시설 운영에 필요한 전력 생산이 시급했고, 이 때문에 석탄증산에 집중했다. 특히 영원발전소의 연료원이 돼 줄 함백탄광 개발에 투자를 집중시켜 1948년 86만9000톤에서 이듬해인 1949년 113만톤으로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이후에도 정부는 석탄증산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며 탄광 개발에 민간 참여를 허락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석탄공사 산하 광업소를 제외한 모든 국유 탄광과 국가 명의의 광구가 민간에게 넘어갔다. 1955년 20곳에 불과하던 민영 탄광이 1961년 200곳이 넘게 됐고, 같은 기간 민영 탄광 생산량은 52만톤에서 277만톤으로 5배 늘었다.

1962년에서 1981년 국내 경제구조가 1차산업에서 2차산업중심으로 전환되며 국내 광산들도 변화를 맞이했다. 1960년대 석탄은 국내 총에너지 수요의 44.4%를 충당하며 매년 증산을 거듭했지만, 같은 시기 정부는 에너지정책을 유류로 전환해 울산에 정유공장을 건설했다. 이는 1966년 10월 연탄파동으로 석탄산업에 1차  위기를 잉태하기도 했다.

한편 1973년에는 석유파동으로 국제 자원시장에서 자원민족주의가 대두됐다. 당시 우리나라 광업은 소규모 광체를 대상으로 운영되던 금속 광산이 점차 침체되고, 석회석을 필두로 한 비금속광물 개발 규모가 커졌다. 이와 함께 해외자원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포항제철과 온산 구리제련소의 준공과 더불어 원료광물의 해외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도 자원의 안정확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해외자원개발법을 제정해 많은 기업들이 해외투자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이다.

1980년 이후 석탄산업은 정부의 석탄합리화 정책 도입으로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석탄합리화 정책은 국내외의 환경변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선 1982년 이후 세계적으로 중국이 본격적인 세계시장 진출에 나서며 광산물을 장기간 저가로 수출했다. 중국은 세계 자원시장의 공급국으로 부상했고, 광물가격은 하향 안정세에 들어가게 됐다.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국내 광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0년대 유가가 장기간 하향 안정세를 보였다.
 
국내에서는 연탄을 가정용 생활연료로 사용하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주거환경도 아파트 형태로 변화하면서 사용이 편리하고 청정한 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무연탄 수요가 갈수록 감소하게 됐다. 동시에 1980년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탄광노동자들의 임금과 관련한 투쟁인 '사북사태' 가 발생,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이같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정부는 1986년 석탄산업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을 발족시켰다. 1989년 332 곳의 탄광중 130곳이 문을 닫았고, 이듬해에는 47곳, 46곳, 50곳 등 점차 그 수를 줄여나가 1996년에는 전국에 단 11곳만이 남게 됐다.

석탄산업합리화정책 도입 후 불과 6년 만에 탄광종사자 수가 7만명에서 1만명 이하로 줄고, 이들이 도시로 떠나며 탄광촌의 지역 경제는 활기를 잃었다.

▲ 국내 한 석회석 광산의 막장에서 장약를 설치하고 폭파하기 위해 암벽에 구멍을 뚫고 있는 모습.

◆ 자원개발, 인재 양성 등 역량 높이기에 집중
광업역사 100년을 되돌아보면 광업의 의의와 현실의 한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광업계는 과거 산업이 낙후돼 내수 기반이 취약했던 시절에는 소규모 광체지만 금속광을 개발해 수출함으로써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됐다. 그러나 국내에 대규모 제철, 제련시설이 가동되며 금속광은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게 됐다. 비금속광은 여건이 나아서 국내에서 대부분을 조달하고 있지만, 고품위 광체의 채진 현상이 발생하고 심부화도 진행되고 있어 갈수록 어려움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는 안정 공급을 위한 해외자원개발에 정책의 방점이 찍혔다.

하지만 현재의 해외자원개발 사업은 대부분이 지분 참여 방식으로 진출하고 있어 우리 기술진의 직접적인 조업 참여율은 매우 낮다는 한계가 있다. 국내 인력의 선순환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개발 초기의 광산 설계단계에서 최종 폐광 후 복원사업까지의 전 광산주기에 걸친 노하우가 축적될 수 있는 기회가 드물다. 이제 인력을 양성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세계 속에서 한국 기술진에 의해 지하자원을 개발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지난한 시간을 견디며, 역량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라는 평가다.

<영월탄광, 남한 최초 개광부터 폐광까지>

▲ 영월마차탄광문화촌에 가면 이처럼 과거 광부들이 채광하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들을 볼 수 있다.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에는 과거 탄광지역의 생활현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탄광문화촌이 있다. 영월탄광은 남한 최초로 개광한 국내 굴지의 탄광으로 자리매김하며 숱한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1937년 정식으로 준공후 1990년 석탄산업 합리화사업으로 폐광되기까지 60여년 동안 850만여톤을 생산했다.

영월탄광은 1929년 조선총독부 산하 지질기사들이 방문하며 공개됐다. 당시 북한 지역은 일본 대기업들이 개천, 강서, 제령, 은률 등지에서 강철과 직철, 구리, 텅스텐, 금 등을 캐내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남한 지역은 지하자원과 전력자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조선총독부는 남한 내 세밀한 지하자원 탐사를 시작했고, 남쪽 내륙의 중심지인 영월에서 거대한 탄맥을 찾아낸 것이다.

이후 한국에 진출해 있던 일본 전력연맹계가 조선전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35년 광업권 등록과 동시에 영월탄광 개발에 착수했다. 탄광개발 소문은 인근지역으로 번져 1912년 토지조사령 반포 이후 많은 토지를 일본인에게 강제로 빼앗긴 농민들은 마차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북쪽 강서와 사동 탄광에서 탄광기술자들이 뽑혀 이주해와, 단신으로 끌려온 중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여장을 풀 새도 없이 곧바로 막장에 투입됐다.

그해 10월 영월탄광과 영월 화력은 오랜 시험가동을 끝내고 정식으로 준공을 선포했다. 영월화력의 1차 전기 생산목표는 5만 7900kw 이며, 여기에 소요되는 탄은 하루 1만7000톤이었다. 1938년 중일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며 전국 각처에는 24시간 가동하는 군수공장이 생겼고, 영월탄광 인근에 장성과 도계탄광이 개광되며 어느새 마차리에는 4000명의 광부가 득실거렸다.

1941년 영월 화력은 터빈 2개를 증설했고, 전기생산은 하루 10만7000kw로  크게 늘었다. 영월탄광에 주어진 하루 생산 목표량은 3만 6000톤, 이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었다. 영월탄광은 힘이 좋고 싸움을 잘하는 한국인을 골라 자신들의 전용직급인 기수보로 등용시켰고, 고원, 용원, 직용이라는 준관리직에도 많은 한국인을 뽑아 올렸다. 이들의 권한은 막강했다. 출근시간에 맞춰 곡을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가 나면 이들은 결근자 집에 찾아가 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막장은 막장대로, 건등에선 건등대로, 한국인 노동자들은 그들의 서슬에 눌려 오금을 펴지 못했다.

1943년 많은 젊은 청년들이 징용에 끌려 갔지만, 영월 탄광 근로자들에게는 현지징용이라는 예외조항을 두어 징용만은 면해줬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그같은 조치를 위안으로 삼고 탄을 캐냈다. 이후 세월이 흘러 1945년 8월 15일 마차리에도 광복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이후 영월탄광은 미 군정청, 상공부 직할로 운영되다가 1951년 석탄공사 창립과 더불어 다시 새출발했다. 1972년 무연탄 감축 정책으로 폐광 위기를 맞았다가 1975년 고려흥업이 일시 운영했다, 다시 석유공사 직영도급으로 전환 후 1990년 폐광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윤애 기자 paver@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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