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책임·無대책·無방향 '3無 전력정책' 위험수위
전문가들 “골든타임 놓치면 뒷감당 못해” 지적

▲ 전력 공급과잉 심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사진은 전력거래소 급전훈련시스템실로 기사와 관련 없음)

[이투뉴스] 지난 1일 오전 3시 정각. 하루 중 가장 전력수요가 적은 이 시간의 국내 부하는 5339만kW로 공급능력(8466만kW) 대비 예비율은 55.8%에 달했다. 정비에 들어가 당장 가동이 어려운 발전소를 제외해도 2979만kW가 ‘OFF' 상태. 원전과 석탄화력만 돌려도 수요충당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실제 전날(30일) 오전 2시에는 일부 유류발전기를 제외한 250여기의 LNG복합·열병합발전기가 일제히 전력생산을 중단했다. 한 LNG발전소 관계자는 “초여름이지만 한낮에도 2~3시간 돌다 말거나 계속 서 있는 발전소도 부지기수다. 가게라면 진즉에 폐업했어야 맞다”고 혀를 내둘렀다.

대한민국에서 전기가 남아돌고 있다. 정확히는 수요보다 공급능력이 많아 멀쩡한 발전기들이 순차적으로 개점휴업 사태를 맞고 있다. 전력수요가 크게 늘어나지 않은 한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유지되거나 신규 발전소 건설에 따라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전기소비자 입장에서 전기가 모자란 것도 아닌데 발전소 가동률이 낮든 높든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지난해 기준 국내 전력 판매량은 48만3655GWh로 일반국민과 산업체가 지불한 전기요금은 53조9600억원에 달한다. 올 한해 국방예산(39조원)이나 교육예산(53조1000억원)보다 많은 액수다. (올해 전체 예산 386조7000억원 기준)

게다가 국가적 전력공급은 천문학적인 인프라와 자본을 필요로 한다. 작년말 기준 한전 및 6개 발전자회사의 자산과 부채는 각각 202조3600억원, 106조6500억원. 이들 발전공기업은 전체 전력 공급량의 83.2%를 책임졌다.(거래액 기준으로는 76.7%)

나머지 16.8%를 공급한 민간발전사업자의 설비투자액까지 포함하면 어림잡아 250조원 가까운 자본이 전력공급을 위해 상시 동원되는 셈이다. 적정 전력예비력 유지가 한 해 300조원(자본+전기료)의 사회자본 운용효율과 직결된 문제라는 주장의 근거다.

단적으로 한전이 지난해 각 발전사에 지급한 도매전력요금의 약 15%(6조2000억원)는 실제 발전량과 무관한 용량요금(4조7522억원)이나 기타정산금(1조4619억원)이다. 발전소는 가동되든 않든 상시 발전대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이 정도의 고정비가 투입된다. 필요 이상의 예비력이 상당기간 지속되면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발전사들의 직접 손실이 발생한다.

진짜 문제는 앞으로다. 매년 2.5%씩 전력수요가 늘어난다는 전제 아래 수립한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2022년 예상 설비예비율은 27.7%다. 그러나 2013년부터 작년까지 연평균 수요증가율은 1.2%에 불과했다. 최근 경제성장 지표와 전력다소비 산업에 드리운 먹구름을 감안하면 향후 수요증가율은 이보다 낮을 것이란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발전소는 계속 증설되는데 예상대로 수요가 늘지 않으면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발전단가가 저렴한 순서대로 가동하는 전력시장 운영원칙에 따라 우선 피크전력을 담당하는 첨두발전기들이 직격탄을 맞고, 좀 더 지나면 저효율 석탄화력의 가동도 불투명해진다.

물론 이렇게 된다고 이미 시장에 진입한 발전기들의 고정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최근 수급상황은 첨두발전기들의 지속적인 이용률 하락 등 불길한 전조를 나타내고 있다. 일차적 원인은 수요둔화지만, 결정적 패착은 2011년 9.15 순환정전 사고 이후 정부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신규발전소 건설계획을 반영한 데 있다.

사태가 이처럼 위중하게 흘러가고 있으나 정부는 여전히 팔짱자세다.

도매전력시장의 비정상적 바이탈사인(Vital sign)과 신기후체제 발효란 거대한 파고는 외면한 채 판매시장 개방이나 에너지신산업 같은 비(非)시급성 시책에 정책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응급 외과수술이 필요한 환자에 영양제나 면역강화제부터 투여하는 격이다.

국책연구기관 한 관계자는 “외부 환경은 급변했는데 정부가 장기계획에 대한 철학도 없이 요금부터 수급계획, 시장운영까지 모두 틀어쥐고 놓지 않으려다 일을 더 키운 측면이 있다. 그걸 인정하고 정책 우선순위를 바꿔 서둘러 대책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금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대책으로 일관하면 사회적 비용이 눈덩이로 불어나 뒷감당이 어렵게 될 것이란 경고다.  

익명을 원한 시장 전문가는 “값싼 전기료에 중독돼 적정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면 향후 모든 외부비용이 재난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며 “정책적 판단이 시급하다. 그게 불투명 할수록 좌초비용만 불어난다. 착공 이전인 신규 석탄화력은 짓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정책적 결단을 위한 논의부터 당장 시작해야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본부장은 “몇 사람의 지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관련 전문가를 총동원해 일단 수요부터 다시 짚어보고 어떤 결정이 가장 경제적인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본부장은 “예비력이 80% 수준까지 상승했던 80년대 후반처럼 일부 설비를 장기휴지(長期休止)하는 방법도 있지만 설비용량이 1억kW에 육박하는 지금은 그런 식의 대응이 쉽지 않다”면서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발빠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후발전기 폐지나 석탄화력 일부 감발 등 대증요법 동원보다 발전원별 온실가스 제약 등 본질적인 정책방향 선회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있다.

전력당국 한 고위 관계자는 "호주처럼 노후 석탄발전기 폐지를 입찰에 붙여 지원하거나 미국 CPP(Clean Power Plan, 청정전력계획)처럼 전원별 온실가스 할당량을 주고 제약을 거는 방법이 가장 유효한 정책"이라며 "관건이 수단이 아니라 정부의 의지와 책임감"이라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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