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막은 엘리트주의 官家 독선·불통 국민이 목도
도매 전력시장 왜곡도 방치…신산업에만 몰두

▲ 채희봉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왼쪽 두번째)이 이달 9일 정부세종청사 산업부 기자실에서 사상 최대전력 기록과 관련, 전력수급 위기경보 단계별 대책과 에너지 사용제한 조치를 시행계획을 브리핑하고 있다. ⓒ산업부

[이투뉴스] “산업부의 이번 누진제 대응을 보면서 관료들의 진짜 실력을 적나라하게 엿본 느낌이다. 디테일도 부족하거니와 국민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 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B기관 관계자)

“깊이는 없는데 일 욕심은 많고, 그렇다고 전문가나 실무자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 것도 아니다. 공기업은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민간기업은 업자로 취급한다. 소비자 요금만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방치한 도매시장에서도 곧 뇌관이 터질거다.” (A발전사 관계자)

“초기대응도 그렇거니와 한전이라는 상장기업의 요금을 경제가 아니라 정치로 접근하는 정책 후진성을 드러냈다. 근본적인 에너지 요금체계 개편이 본질이다. 덮고 갈 사안이 아니다.” (C 컨설팅사 CEO)

가정용 누진제 요금폭탄이 결과적으로 전력정책의 민낯을 들춘 셈이 됐다. 이번 사태로 많은 국민들은 엘리트주의에 빠진 관가가 지금까지 얼마나 귀를 막고 독선과 불통의 행정을 이어왔는지 단면을 목도했고, 끝까지 진실을 호도한데 공분하고 있다.

폭염과 열대야가 누그러져도 성난 민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을 듯 보인다. ‘국민편익’이란 수사(修辭) 아래 가려져 있던 환부가 여실히 드러난만큼, 이번 기회에 관치 전력정책의 폐단을 과감히 들어내고 기존 요금체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하다.

산업부는 현재 전력수급계획 수립부터 도소매 전력시장 운영, 전력공기업 관리·감독 부문의 사실상 전권을 갖고 있고, 정치권과 재정당국, 청와대까지 개입하는 전기료 조정에 대해서도 주무부처로서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누진제로 드러난 산업부 실상 = 이달초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도 전기료 폭탄이 두려워 맘대로 에어컨을 돌리지 못한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산업부는 누진제 개편 불가론을 설파하며 공공연하게 가정용 전기료 원가, 부자감세 논란, 전력수급 불안 위험 등을 운운했다.

그러면서 “에어컨을 합리적으로 쓰면 요금폭탄은 없다”, “누진제 개편은 부자감세다", “OECD 대비 주택용은 싸다”, “전력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채희봉 에너지자원실장)고 엄포를 놨고, 으레 그래왔듯 ‘에너지절약’ 문구가 쓰인 어깨띠를 두르고 ‘개문냉방’ 근절 캠페인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어컨을 좀 틀게 해달라’는 국민의 소박한 바람을 단숨에 생떼로 만들었다. 엘리트주의에 매몰된 정부 관료들의 상황 인식과 이들이 정책결정의 근거로 삼아 온 각종 수치들이 얼마나 국민정서나 전력산업과 동떨어져 있는지 국민 앞에 생중계 한 꼴이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적어도 올해 기준 가정용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비싼 전기를 쓰고 있고 ‣부자감세와 전기료는 하등 관련이 없으며 ‣전력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경고는 과장이다. 우선 가정용 요금이 싸고 원가 이하란 전제는 ‘과거엔 맞을 수 있지만, 지금은 분명 틀리다’.

한전의 가정용 공급원가(미공개)를 대략 kWh당 150원으로 잡는다면, 한달 200kWh 이하를 사용하는 극빈층이나 저소득층 가구는 지금도 원가이하(50.7~125.9원)에 전기를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대다수 국민은 원가보다 최대 5배 이상 비싼 전기를 쓰고 있다.

최근 최저-최고 누진율 격차가 11.7배라는 보도내용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한달에 100kWh 미만을 사용해 6000원 가량을 내는 가구 비중이 소숫점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 누진율은 5.6배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6단계 709.5원 ÷ 2구간 125.9원)

전력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대다수 가정은 원가보다 최소 2배에서 최대 5.6배짜리 전기를 사용해 온 것이 팩트인데, 정부는 줄곧 가정용을 원가보다 낮게 공급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전 세계적으로도 400~700원짜리 전기를 사용하는 가정은 찾아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누진제 완화를 부자감세와 수급 불안으로 연결시키는 정부 논리도 선동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전기료는 종종 ‘전기세’로 불리지만 엄연히 사용량에 비례해 대가를 지불하는 요금이다. ‘감세’라는 비유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달에 1000만원이 넘는 전기료를 내는 재벌도 원가 이상의 요금을 냈으면 냈지 세금 감면혜택을 받은 적은 없다. 다만 전기는 원료가 모두 외산이고, 누군가 낭비하면 누군가가 절약해야 하는 한정적 재화여서 합리적인 소비가 필요하다. 또 빈곤층에게 전기는 최소한의 복지다. 전기의 공공성은 여기에 뿌리가 있다.

해법은 어렵지 않다. 전문가들은 "에너지복지가 필요한 저소득층은 바우처 쿠폰 등을 지원하고, 굳이 과소비 억제장치가 있어야 한다면 500kWh 이상인 현행 최고 누진율 구간(6구간)을 1000kWh 이상으로 조정하거나 아예 6구간을 없애면 된다"고 조언한다.

▲ 우태희 산업부 제2차관이 지난 11일 긴급 당정협의를 거쳐 결정된 7~9월 주택용 누진제 경감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알고 그랬나, 모르고 그랬나 = 정부가 누진제 개편 불가론을 펼 때 업계조차 혀를 내두른 대목은 따로 있다. “여름철까지 전기를 많이 쓰게 하려면 발전소를 또 지어야 한다”며 공공연히 수급불안 우려를 제기한 점이다. 발전업계는 “알고 그랬다면 국민을 상대로 한 거짓 협박”이라고 했다.

발전사들에 따르면, 가정용 누진제 완화로 예상되는 피크부하량 상승 및 소비량 증가는 전체 전력수급을 불안하게 할만큼 크지 않을뿐더러 현 수급상황은 오히려 전력부족이 아니라 공급력 과잉에 따른 비효율과 사회적 비용을 걱정해야 할 때다.

<본지 7월 1일자 1면, 전력 공급과잉 사회적 손실 '눈덩이' 기사 참조>

특히 가정용 전력소비가 몰리는 출근시간 이전과 퇴근시간 이후는 주간 최대 피크시간대에 겹치지 않아 항상 넉넉한 예비력이 확보되는 구간이다. 설령 피크시간대에 부하가 다소 늘더라도 가용가능한 수요관리 수단으로 얼마든지 통제 가능한 양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 전력시장 전문가는 “주택용 비중은 전체의 13~15%에 불과하고 피크시간도 달라 누진제를 푼더라도 영향이 크지 않고 다소 늘어나는 부하는 수요관리(DR)나 시간대별 요금제 등을 통해서 적극 관리하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발전사 관계자는 “전력대란을 걱정해야 한다는 산업부 말에 동의할 발전사들이 얼마나 되겠나. 여전히 많은 LNG발전기들이 피크 때나 잠깐 돌다 휴업하는 신세”라면서 “정부가 양적 개념인 수요와 순간 최대전력을 혼동하는 국민을 상대로 의도적인 본질흐리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라고 일갈했다.

또다른 발전사 관계자는 "국민은 누진제가 무서워 맘대로 에어컨도 못돌린다는데 첨두발전기들은 이용률이 갈수록 떨어지고 마진이 남지 않아 새 발전소가 매물로 나돌고 있다. 소매 못지 않게 왜곡이 심한 도매시장을 방치해 온 것도 정부"라면서 "정말 해야할 일을 미뤄둘 경우 언젠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누진제만 어물쩍 손보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도 지적한다. 에너지컨설팅 전문기업 CEO는 "포퓰리즘에 휘둘려 상장사(한전) 이익을 맘대로 넣었다 빼었다하며 이제껏 미봉책으로 넘어가다가 여기까지 왔다. 대기업 눈치볼 일이 아니다. 전반적인 요금체계부터 적정요금 개편방향까지 최종 데드라인을 정해 그 결과를 공개하고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요금제 개편은 전력산업과 시장에 대한 입체적 진단과 처방이 필요한 사안인만큼 정부 당국이 국민과 소통하면서 충분히 숙의할 수 있는 시간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전력당국 고위관계자는 "과정과 결과가 아쉽더라도 국민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애초 정책 취지는 순수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정된 시간안에 성과를 내야하는 관료사회 특성상 목표지향적일 수밖에 없는데,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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