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펙트체크] 6.11 서울·경기 19만세대 대규모 정전사고의 이면
세계 최소 정전 불구 소비자 수용성 낮아…투자적정선 고민해야

▲ 전력거래소 중앙전력관제센터 ⓒkpx

[이투뉴스] 휴일 한낮, 서울은 평온했다. TV는 예능프로를 방영했고, 복합쇼핑몰에선 한가로운 외식과 쇼핑, 영화관람 등이 이뤄졌다. 어디선가 웨딩마치도 울렸다. 예고 없는 정전이 대도시의 이런 풍경을 일순간 정지화면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난 11일 오후 12시 53분. 서울 남서부 구로·금천구 일대와 경기 광명·시흥시 일부지역 전력공급이 끊겼다. 150여대의 엘리베이터가 사람을 가둔 채 공중에서 멈춰 섰고, 200여 곳의 신호등이 꺼져 차량들이 우왕좌왕했다. 한전 추산 약 19만 세대가 영향권에 든 이례적 대규모 정전이었다.

당국의 조사가 끝나지 않았지만, 이번 사고는 특정 변전설비 고장이 1차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인천과 충남권 발전소에서 생산된 34만5000볼트의 특고압 전기를 15만4000볼트로 낮춰주는 광명시 영서변전소의 차단기에서 설비파손을 뜻하는 그을음이 발견됐다. 효성이 납품한 이 차단기는 2002년 8월 설치됐고, 2014년 정기점검 때도 정상 판정을 받았다. 30년 가까이 멀쩡한 다른 설비와 비교하면 노후화로 고장 원인을 단정하기는 무리라는 게 중론이다. 한전은 정확한 원인 분석을 위해 학계·연구계 전문가로 구성된 고장조사위원회를 가동했다.

어찌됐건 범인을 색출했으니 이제 따져볼 부분은 전력당국의 초동대처나 평소 설비·계통 운영관리의 적절성 여부가 됐다. 우선 정전 22분만인 오후 1시 15분 전력공급을 재개한 것은 빠른 조치였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일시에 꺼진 촛불 여러개를 다시 켜려면 일정시간이 필요하듯, 여러지역에 걸친 정전복구도 마찬가지란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당시 정전지역 수요는 32만kW. 관할인 한전 남서울본부와 경기본부 광명지사는 영서변전소를 통한 송전이 불가능해지자 반대편 신양재변전소(345kV)와 사당변전소(154kV) 루트를 이용해 전력을 우회 송전했다.

다만 정전 시 연쇄 고장을 일으킨 일부 건물이나 아파트 구내설비 복구까지는 더 지체돼 일부 주민의 불편이 초래됐다. 한전의 관리책임은 발전소부터 수용가 수전설비 직전까지로, 옥내 변압기 등의 설비 소유권과 관리는 전기소비자 몫이다. 한전과 무관한 한 계통전문가는 사견임을 전제로 “그날 그 정도로 신속하게 대처한 것은 사실 칭찬받아야 할 일”이라며 “현장에서의 1차 대응과 계통 관제업무가 모두 적절하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 했다”고 호평했다. 이 관계자는 “고장 발생과 복구까지 일련의 과정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초동대응이 적절했다 해도 변전소 차단기 한 대가 고장을 일으켜 발생한 정전치고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각에선 기술적으로 ‘무정전’이 가능함에도 전력계통을 관리하는 중앙관제 업무가 실시간으로 이뤄지지 않아 정전을 겪고 있다는 주장도 편다. 관련 전문가들은 “전력계통과 국내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들”이라고 일축했다. “전력망이 존재하는 한 정전 가능성을 0%로 유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일정수준 이상 정전시간을 줄이는 일은 막대한 투자를 필요로 해 경제성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분석을 인용하면 일단 6.11 정전이 발생한 지역은 다른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좁은 면적에 전력수요가 집중돼 있는 계통 취약지역이다. 우리나라는 발전소부터 송변전설비까지 밀집도가 세계 최고수준인데, 특히 광역시 수준의 대도시는 전력망이 과도하게 몰려 있어 만일의 고장사고에 대비해 의도적으로 선로를 군데군데 떼어놓는 ‘선로분리’, 또는 ‘모선분리’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특정지역 고장·사고 충격(고장전류)이 차단기 용량을 초과해 걷잡을 수 없이 인근으로 연쇄 파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는 도쿄전력 등 일본 대도심 전력회사들도 마찬가지다.

본지가 6.11 정전사고 지역 송전계통도를 입수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문제를 일으킨 차단기는 영서변전소에서 광명·구공·대림·독산·신길·대방·시흥 등 하위 7개 154kV변전소로 전력을 내보내는 2개 모선(母線) 사이에 설치된 것이다. 고장전류 차단을 위해 영서변전소와 신양재변전소 사이(도로로 치면 남부순환로 동서구간)를 평소 끊어놨다가 영서쪽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신양재 라인을 연결해 망을 되살린 셈이다. 당국 관계자는 “대도시는 부하통제가 안되니 망(網)사업 투자로 리스크를 좀 더 낮춰야 한다”면서도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하므로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는 정책적으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수십년간 양질의 전력을 사용하면서 굳어진 ‘정전을 용인하지 않는’ 전기소비자 인식도 ‘어느 정도 정전은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세계 주요국 전력품질 통계에 의하면, 작년말 기준 한국의 가구당 연간 정전시간은 9.6분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짧다. 대만의 경우 우리보다 2배(18.0분), 미국(58.4분)과 영국(60.3분)은 각각 6배 가량 정전시간이 길고, 프랑스의 경우 1시간 20분에 달한다.(2013년 기준). 가까운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전력(9분대)은 우수하지만 오키나와전력은 7시간을 넘길 정도로 격차가 크다.

반면 현실과 대국민 인식 사이의 간극은 아직 멀어 보인다. 6.11 정전사고 소식을 알리는 당일 보도기사에 대해 누리꾼들은 “수도에서 대규모 정전이라니 개발도상국이냐!”, “이런 식으로 일하며 전기세(요금)는 비싸게 받고, 철저히 조사해라” 등의 날선 반응을 보였다. 전영환 홍익대 전기공학과 교수는 "이번 정전은 근본적으로는 부하 집중이 원인이어서 설비투자로 해결하는 건 한계가 있다. 전원의 분산화 뿐만 아니라 소비의 분산화도 필요하다"면서 "국민들도 과도하지 않은 정전을 용인해야 과투자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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