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배터리 여권' 만드는데 韓 ESS화재 매뉴얼도 없어

[특수재난전문가의 한탄] 김흥환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소방위 제조사 정보보호 정책 고수하는 사이 예방안전관리 기회 놓쳐 부처별 칸막이로 역할 구분·연계 없이 전주기 관리체계 구멍

2024-03-31     김흥환
프랑스 비비에즈 배터리재활용 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를 보도한 '프랑스24' 기사 인터넷판 갈무리
김흥환 경기소방재난본부 소방위

[이투뉴스/김흥환 소방위] 지난달 18일 프랑스 남부 비비에즈 소재 한 배터리재활용공장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 약 900여톤의 리튬이온배터리(LIB)가 시커먼 연기를 피어올리며 소실됐다. 프랑스에서는 작년 1월에도 자동차부품과 수천개의 LIB를 보관하던 노르망디 창고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었다. 당국자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근 거주자들에게 위험은 없다고 했으나 현장 보안 메모에서는 대형 화재 시 폐배터리가 연기를 통해 카드뮴을 방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카드뮴은 독성이 강하고 유해하다. 그런가 하면 지난 27일 일본 가고시마현 이사시 한 태양광에서는 6.5MWh규모 계통연계형 ESS에서 불이 나 ESS건물이 전소되고 소방대원이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에너지를 품고 있는 배터리는 수명주기 안이든 재활용 단계든 잘못 취급할 경우 화재를 유발할 수 있다. 전기차 1대만 열폭주를 일으켜도 관할 소방서에서 비상수준의 대응단계를 발령하고 있지만, 아직 ESS 등의 대용량 배터리에 대해서는 세부 대응매뉴얼조차 구비돼 있지 않은 게 우리의 씁쓸한 현실이다. 만약 프랑스에서처럼 다량의 LIB가 쌓여있는 우리나라 사용후배터리 회수창고나 해체장소, LIB 물류창고 등에서 화재가 발생한다면 현장 인력과 소방관들은 얼마나 큰 화재·폭발위험에 놓이게 될까.

韓 ESS·폐배터리 화재 대응매뉴얼 부재
LIB는 이제 우리 일상생활에서 적용되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유용하고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엄청난 양의 사용후배터리가 발생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문제는 LIB에 대해 최초 제조단계부터 사용후배터리·재제조(복원)·재사용(부품활용)·재활용(분해 및 추출)에 이르기까지 전주기가 통합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이런 문제점은 지난달 중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STEPI Insight> 320호에 게재한 '전기차 사용후 배터리 전주기 안전규제 체계 구축방안’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현재 유럽연합(EU)은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배터리 여권제도’로 불리는 새 배터리 규제(New Batteries Regulation)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배터리 원재료의 채굴, 생산, 판매, 사용, 폐기, 재활용, 재활용 재료 이용 등에 이르는 모든 가치사슬 정보를 통일된 디지털 플랫폼에 기록·관리한다는 계획이다. 향후 전기차 뿐만 아니라 전동킥보드에 이르기까지 점차 전 세계 모든 배터리 제조사가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배터리 여권의 제도화는 전주기 배터리 관리를 의미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배터리 회수 및 해체 시 안정성 향상을 위해 배터리 관련 정보를 블록체인이나 분산형 장표기술로 표준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 내 누구나 배터리 제조사별 모든 제품 안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국 소비자들도 국민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LIB의 각종 소재물질과 관련된 위험성 정보들을 취득하게 될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기업의 경쟁력과 기밀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재난과 안전에 대한 정보마저 제공하지 않아 강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LIB 재활용이 EU의 새 배터리 규제와 미국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으로 강한 규제를 받게될 상황에 향후 배터리 제조부터 재활용까지 모든 정보는 통합적으로 관리되고 지속적인 위험성 평가 아래 전주기 관점에서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EU(유럽위원회 및 유럽의회)의 '새 배터리 규제(New Batteries Regulation)' 표지

하지만 국내는 여전히 부처별 칸막이로 사용후배터리를 지칭하는 용어도 부처별로 다르고, 단계별 역할도 긴밀한 연계로 구분돼 있지 않아 전주기 관리체계에 구멍이 많다. LIB는 모든 분야와 장소에서 쓰이고 있으므로, 특정부처가 아닌 범부처·범정부 차원의 통합관리체계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 배터리제조사(생산자)의 책임을 강화하고, 특히 열폭주 및 오프가스 발생 등의 위험성과 관련한  정보가 충분히 관계 당국에 제공되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국제규제에 발맞추어 산업의 발전도 담보할 수 있고, 만일의 대형복합재난 발생 시 대규모 인명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

범부처·범정부 차원의 통합관리체계 구축 필요
현재 EU·중국 등은 제조사가 전기차와 관련한 기업정보를 공개하도록 의무규정을 두고 있으나 국내는 위험정보는 커녕 화재·폭발사고 이후에도 감식 결과조차 제대로 공유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삼척 ESS 화재안전성검증센터의 인프라를 활용해 열폭주와 더불어 발생할 수 있는 독성·폭발성·인화성 위험에 대해 제조사 스스로 실험을 진행하고 그 데이터를 공유토록 해야 한다.  그렇게해야 관련 산업이 성장하고 소방관들도 사고 시 인명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매뉴얼을 구비하고 적절한 초동조치를 할 수 있다. 유해물질 화학사고에 대비해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사용하는 것처럼 배터리 제조사가 정보를 스스로 제공하도록 하면 된다.

두번째 시급한 일은 배터리의 수명(SOH), 안전진단 및 화재징후 예측기술 개발이다. LIB 사고는 열폭주를 시작으로 폭발(방호불가), 화재(초고온) 및 독성 가스(누출위험)의 발생을 동반하며, 이미 열폭주가 시작되면 반응을 멈출 수 없고 대응보다는 예방의 중요성이 압도적이다. 또 배터리의 재활용을 위해서는 제대로된 상태진단분석 기술이 필요하다. 일부 전문가들에 의하면 독일은 공개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빅데이터 분석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상당한 수준의 배터리 불량판정과 화재징후 예측기술을 확보했다. 우리가 대기업 제조사 사업중심의 정책을 고수하는 사이 전 세계는 공개데이터를 기반으로 예방차원의 LIB 안전관리를 현실화하고 있다. 

미래에 우리가 당면할 문제들은 특정 분야 전문가가 혼자가 아니라 다방면의 전문가들의 융합과 협조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며, 정부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융합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미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국제 표준(NFPA, EN, IEC 등)을 국내에도 지체없이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일단 국제 기술표준을 시차없이 즉각 반영한 뒤 우리실정과 다른 부분은 일정기간내 조정하는 방식이 적합하다. 서구권에서도 인정하는 재난선진국 싱가포르는 재난·안전에 관련한 법규를 별도 제정하기보다는 서구권 NFPA코드를 그대로 활용해 모든 재난에 대처하고 있다.

전문가와 정보가 제한된 첨단산업 분야에서 국내 전문가만으로 빠르게 변하는 기술트렌드에 맞춰 안전기준과 대응매뉴얼을 갖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재난·안전 행정가는 많은데 정작 현장·기술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도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배터리산업을 겨냥한 중국기업의 파상공세가 매섭다. 안전을 도외 시 한 산업은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김흥환 경기도소방재난본부 소방위 (특수재난전문가) squallki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