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청정 제조업이라는 새로운 배에 승선하기 위해서는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부대표(기후전문가)

2025-01-27     고은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부대표(기후전문가)

[이투뉴스 칼럼 / 고은] 2025년 1월의 대한민국은 정치만큼이나 경제도 갈 길을 잃은 모습이다. 반도체 등 주력 수출업종의 경쟁은 심화되고 글로벌 공급과잉과 중국의 순수출국 전환으로 철강과 석유화학은 적자폭을 늘려가고 있다 한때 극한의 효율성과 근면한 노동력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던 한국 제조업의 위기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혼란스러운 정국과 맞물려 그 전망이 더욱 암울하게 보인다. 한국은행이 올해 경제성장률을 1.9%로 전망한 것도 이를 방증한다.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명확하다. 북미와 유럽은 리쇼어링 정책과 함께 관세·기후장벽을 높이 쌓고 있다. 한국 제품을 사들이던 중국은 이제 스스로 생산자가 되었고 중요한 수출시장인 동남아시아는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과 인도 제품에 빠르게 잠식되고 있다. 이제 한국은 세 가지 선택지를 마주하고 있다. 선진국의 무역장벽을 뛰어넘는 제품을 만들거나, 미래산업의 핵심부품을 생산하거나, 아니면 중국과 인도와는 차원이 다른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선택지가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AI, 수소, 배터리, 재생에너지, 로봇, 반도체 등 미래 산업의 키워드들은 모두 탈탄소와 지속가능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화석연료 기반의 산업구조는 이제 재생에너지와 순환경제 중심으로 전환 압박을 받고 있으며,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기술은 이미 물리적 세계와 깊이 융합되어 전통 제조업을 재편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무역과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트렌드 셋터의 위치에 있지는 않다. 따라서 침몰하는 배가 어딘지, 갈아타야 할 배는 어딘지 빨리 포착하고 승선할 준비를 서두르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다. 청정 제조업은 갈아타야 할 새 배의 이름이다.

청정 제조업의 산업 지형은 한국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해상풍력을 예로 들어보자. 수백 미터 규모의 구조물과 장비는 해상운송이 필수적인데,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핵심 공급기지가 되기에 최적이다. 여기에 세계적 수준의 조선해양 기술력과 제조 인프라, 높은 신뢰도를 자랑하는 한국 기업들의 역량이 더해지면 시장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다.

수소를 활용하는 청정 제조업의 경우, 한국은 단순한 상품의 공급자가 아니라 역내 산업 공급망의 조성자가 될 수 있다. 수소의 물리적 특성상 장거리 운송이 비효율적이므로, 지역 단위의 생산-소비 체계가 필수적이다. 한국은 그간의 제조업으로 쌓아온 기술력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자원이 풍부한 아시아, 호주 지역에 수소 기반의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완제품 생산자로 그 공급망을 설계할 수 있다. 그린철강처럼 수소가 필요한 산업이 이 기회를 노려볼 수 있다. 

아직 시장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어려움이 산적해 있다. 예를 들어, 그린철강은 국내에서 수요 기반이 거의 없고, 해상풍력에 필요한 구조물 및 케이블 제조사들은 트랙 레코드 부족으로 글로벌 입찰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정부는 공공조달 정책 개선과 해상풍력 단지 조성 등을 통해 초기 단계의 물량을 흡수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기업들에 테스트베드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청정 제조업을 위한 인프라도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수소 유통을 위한 비용 효율적인 공급망, 해상풍력 설치를 위한 전용 항만과 선박, 청정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그리드 등은 필수적인 기반이다.

속도를 내야할 이유도 분명하다. 중국은 이미 첨단기술과 핵심자원을 선점했고, 정부 주도의 효율적인 산업 육성으로 무서운 속도의 성장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배터리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보했고, 한국보다 앞서 수소환원제철 실증 프로젝트 가동에 성공했다. 

기업들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스코는 그린철강 생산을 위해 서호주 HBI 생산기지 조성을 검토 중이며, 해상풍력 발전 인허가 신청 규모는 28GW 수준으로 2030년 국가 보급목표(14.3GW)의 두 배에 근접한다. 주요 기업들의 신년사는 하나같이 체질 개선과 포트폴리오 고도화를 강조한다. 이처럼 민간의 전환 의지는 충분하다. 이제 정부가 제도와 인프라 구축으로 이 변화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가속도를 높여줄 차례다.

탈탄소와 지속가능성은 배부르고 등 따뜻할 때나 생각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새로운 산업 질서의 기본 조건이 되었고 우리가 새로운 배에 승선하기 위한 유일한 티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