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은 아시아 청정 제조의 설계자가 될 수 있다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부대표(기후전문가)
[이투뉴스 칼럼 / 고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강한 추동력을 받았던 기후 대응이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다. 세계 경제가 둔화되고 정치가 극우화되면서 기후회의론이 세를 얻고 투자자들 사이에는 ESG가 거론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이러한 흐름을 감지한 한국에서도 탈탄소 대응은 빠르게 정체 국면에 들어섰다.
이 흐름은 한국의 기후 대응이 국제 흐름에 발맞춘 ‘보여주기’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내부에서 절실히 필요성을 느껴서라기보다, 미국이 하니까, 유럽이 하니까, 일본과 중국도 하니까 우리도 해야 한다는, 뒤처지기 싫은 심리에서 비롯된 면이 컸다. 또한 글로벌 시장과 국제사회에서 평판을 유지하기 위한 리스크 회피적 성향이 동력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넷제로의 추동력은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이 되었지만 한국은 매우 빠르게 그 패러다임에 맞추어 추격했다. 배터리, 열분해유, 바이오플라스틱 등의 순환자원, 친환경 선박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확장했고, 수소 생산을 위한 해외 투자와 국가 간 협력도 빠르게 추진했다. 그런데 북미와 유럽의 넷제로 흐름이 정체국면을 맞이한 상황이 오자, 한국도 덩달아 관망세로 전환하고 있다. 저탄소 기술 투자가 조정되거나 지연되고, 정부의 배출권거래제 4기의 계획이나 2035 NDC 목표설정 등도 필요한 속도와 규모에 미치지 못했다.
세계 경제 질서는 오랫동안 유럽과 북미가 주도해왔다. 산업 규범도, 무역 질서도 그들의 기준을 따라야 했다. 동아시아는 그 무대에 발을 맞추어 상품을 생산해왔다. 하지만 지금, 세계 질서는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자국 제조업 부흥을 강조하고, 유럽도 산업 자급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도 산업·무역 구조를 다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은, 다시 아시아를 바라보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든 만큼 아시아에서 자체적인 산업·무역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첫걸음은 청정 제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탈탄소 시대의 제조업은 청정 연·원료를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철강, 배터리, 석유화학 등 주요 산업군에서 청정 제조 혁신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안정적 생산 기반을 위해 국외 자원 확보가 필수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호주는 풍부한 재생자원, 안정된 정치 및 경제 구조, 탄탄한 인프라를 갖춘 유망한 투자국이자 교역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동남아시아 역시 중요한 축이 될 수 있다. 동남아시아는 기후변화 취약국이 많아, 자국 영토와 국민 후생을 보호하고 지속가능한 경제 번영을 위해 지금부터 소비, 수입, 투자, 조달 측면에서 지속가능성을 내재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풍부한 재생에너지 자원, 젊은 인구,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기반은 청정 제조업의 생산 기지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 아직 탈탄소가 최우선 순위는 아니지만, 정책과 투자에 따라 시장 환경은 변할 수 있다. 한국은 기술력, 자본력, 그리고 기획력을 통해 이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 국내 산업을 탈탄소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내 파트너들과 함께 청정 제조업 기반을 구성하는 것이다. 물론 동남아 지역은 이미 중국과 일본의 경제적 존재감이 크지만, 한국은 ‘탈탄소 전환’이라는 새로운 산업 질서에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은 전세계 제조품의 40%를 생산한다 (2022년 기준). 궁극적으로 세계는 아시아를 빼놓고 넷제로 전환을 논의할 수가 없다. 책임도 막중한 만큼, 자체적인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만큼의 존재감을 이미 갖추고 있다. 한국은 이 여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아시아의 청정 제조 생태계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주변 국가들과 함께 구축해가야 한다. 북미와 유럽의 흔들림과 상관없이 우리의 길을 스스로 신뢰하며 꾸준히 걸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