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CSO (기후전문가)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CSO (기후전문가)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CSO
(기후전문가)

[이투뉴스 칼럼 / 고은]석유 한방울 나지 않지만 세계 5위 수준의 정유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 핵심광물 자원 없이도 세계 배터리 수요의 30%를 생산하는 나라, 스마트폰의 창시자 애플만큼 스마트폰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 자원빈국인 우리나라에서 이뤄낸 경제 성과는 훌륭한 인적, 기술적 인프라를 기반으로 절실한 변화와 혁신을 통해 일구어낸 탄탄한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우리나라가 지금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또다른 파고 앞에서는 유독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탄소중립과 ESG는 대부분의 기업들의 경영화두가 되었지만, 막상 기업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탄소중립 미대응으로 인한 비용적인 임팩트는 크지 않다고 말한다. 탄소중립 선언을 하고 거버넌스 체계를 갖추는 등 구색을 맞추면 ESG 평가는 나쁘지 않은 등급을 받을 수 있고, 배출권거래제가 있긴 하지만 기업에 비용적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 무상할당량을 제공받고 있다. 우리나라 배출량 1위인 포스코마저도 배출권으로 인한 재무부담이 크지 않다 밝힌 걸 보면, 기업 입장에서 탄소중립 대응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은 당연한 전략이다.

5월 기준 우리나라 배출권 가격은 2만원 수준인데, NGFS(Network for Greening the Financial System, 세계 주요 중앙은행과 금융감독기구의 기후 리스크 논의 협의체)는 한국이 2050년 넷제로 달성을 위해서는 2025년에 적어도 탄소가격이 87.4달러(11만원 상당)가 되어야 한다고 분석한다. 즉, 현재의 우리나라 배출권 시장은 넷제로 목표를 달성할만큼의 감축유인을 주는 수준으로 가격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업의 탈탄소 혁신을 유도하는 방법은 명확하다. 비용적 유인체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현행 배출권거래제의 과도한 총할당량을 NDC에 맞추어 축소하고, 무상할당 비율은 대폭 낮추어 배출권 수요를 높이고 배출권 시장을 활성화하여 기업이 움직일만한 수준의 배출권 가격 시그널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미 작년말 정부는 배출권거래제 3차 할당계획 변경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으며 지난 3일 인수위가 발표한 110개 국정과제에도 배출권거래제의 유상할당 확대가 담긴 바 있다. 하지만 기업의 배출채무가 비용부담으로 이어진다는 기사가 연일 나오는 가운데, 산업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제대로 개선을 추진하기엔 정부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담 때문에 배출권거래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산업계의 탄소중립은 더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배출권 가격 상승으로 인한 수출 경쟁력 약화를 방어하고 탄소누출(carbon leakage)를 막기 위해 고려해 볼만한 제도가 있다. 바로 네덜란드와 독일의 탄소차액계약제도(Carbon Contract for Difference, CCfD)가 그것이다. CCfD는 조기상용화가 필요한 탄소감축기술을 도입한 기업이나 프로젝트가 달성한 온실가스 감축량만큼 장기 고정금액으로 정부가 지원금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이때 정부가 보장해주는 금액 수준은 기존의 생산비용 대비 탄소감축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감당해야 하는 비용 증분만큼을 보상해주는 수준으로, 기업은 비용 증가에 대한 부담없이 기술에 대한 투자를 과감히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실제 감축된 탄소량에 비례하여 지원을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성과에 연동되지 않은 눈먼 지원을 방지할 수 있다. 배출권거래제와 CCfD가 제대로 작동을 하면 우리나라에서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기업은 배출권거래제를 통해 수익을 얻거나, 적어도 손해를 안보는 구조가 조성될 수 있다. 물론 CCfD와 배출권거래제가 효과적으로 연동이 되어 유의미한 감축 유인을 줄 수 있도록 제도 설계 연구는 필요하다.

이제껏 발표된 이번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 특징은 원전의 활용과 혁신기술 지원 등 일견 ‘기업 달래기’ 중심이었다. 하지만 막연한 지원이 기업 프렌들리는 아니다. 민간주도의 성장을 표방하는 이번 정부에서는 배출권 시장의 강화와 감축 성과에 연동한 지원책을 통해 산업계의 변화와 혁신 잠재력이 최대한 발현될 수 있는 시장 환경을 조성해주는 그런 탄소중립 정책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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