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CSO(기후전문가)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CSO(기후전문가)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CSO
(기후전문가)

[이투뉴스 칼럼 / 고은] 산업부문의 탈탄소는 연·원료의 변화가 핵심이다. 철강재 생산을 위해 석탄 대신 그린 수소를 사용하고, 플라스틱 생산을 위해 원유 나프타 대신 폐플라스틱이나 바이오 원료를 사용하며, 시멘트업 생산을 위해 석회석을 대체할 혼합재 비율을 높이는 등 기존에 사용하지 않았던 연·원료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런데 보통 대체 연·원료는 전통 연·원료보다 아직 비싸다. 수소환원제철 개발에 가장 먼저 착수한 SSAB사의 추정에 따르면 수소환원철은 기존 철강 대비 30% 비쌀 것으로 분석되고, 바이오플라스틱은 기존 플라스틱 대비 생산단가가 최대 2.5배 더 높다(한국바이오소재패키징협회, 2022). 

이처럼 비싼 녹색철강, 재생플라스틱, 저탄소 혼합계시멘트를 구매해줄 수요처는 과연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의 대답은 ‘거의 없다’다. 기후 리더십을 가져가고자 하는 굴지의 세계 기업, 예컨대 볼보, 스타벅스, 애플 등을 제외하면 프리미엄이 붙은 녹색제품을 사줄 큰 구매처는 아직 없다. 시장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상품에 과감히 투자할 기업이 몇이나 될까. 저탄소 제품의 수요처가 확보되지 않으면 기업은 탈탄소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녹색 수요 창출을 위한 제도적 기반은 매우 잘 마련되어 있다. 공공기관의 녹색제품 의무구매제도와 공공조달 최소녹색기준 제도는 이미 십여년간 운영되어 왔다. 녹색제품 의무구매제도는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녹색제품을 구매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으며 최소녹색기준은 조달시장에 진입하고자 하는 제품들이라면 반드시 충족해야 할 녹색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저탄소 제품의 생산 촉진 효과는 제한적이다. 한국 공공조달제도에서의 ‘녹색’은 반드시 ‘기후친화적’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행에서 녹색제품이란 제품 전과정에 걸쳐 환경성이 우수한 환경표지제품, 재활용 원료 비율이 높은 우수재활용제품, 그리고 동종업종의 평균보다 우수한 탄소발자국을 가진 저탄소제품으로 정의되며 3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하면 녹색제품이 된다. 기후변화 대응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행의 녹색제품 정의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탄소배출량이 높아도 생산과정에 있어 유해물질 사용량, 에너지효율 등의 요건만 충족해도 녹색제품이 되기 때문이다.

최소녹색기준제도에서는 애초에 탄소배출량을 평가 요인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에너지 소비효율, 유해물질저감, 재활용률, 대기전력저감만을 기준 항목에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제도의 적용을 받는 109개의 품목은 공공기관의 수요가 높은 제품군 위주로 선정이 되다보니 환경 혹은 기후 영향도가 막대한 철강재나 플라스틱 등의 제품군은 제외되어 있다. 물론 이 두 제도는 기후변화에 대한 시급도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던 2005년, 2010년에 각각 입안되었기에 오늘날의 기후위기 심각성을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민간 조달부문을 중심으로 녹색수요 창출을 위한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볼보는 넷제로 이니셔티브인 스틸제로(SteelZero)에 가입함으로써 2030년까지 전체 철강 중 50%를 저탄소 철강으로 사용하겠다는 중간 목표에 동참하였으며 지난 6월 녹색철강으로 만든 건설기계 트럭을 처음으로 납품하였다. 글로벌 철강사 이니셔티브인 리스폰시블스틸(ResponsibleSteel)에서는 녹색철강의 온실가스 배출량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국가보다 민간이 선제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이 꽤나 인상적인데, 글로벌 RE100 이니셔티브가 K-RE100의 출범 및 재생전력확대를 위한 정책논의를 가속화시켰듯이, 조달 영역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반복될지 지켜볼 일이다.

정부는 그때까지 손놓고 기다리기보다 선제적으로 저탄소 혹은 녹색제품의 기준을 재정립하여 시장을 대상으로 확실한 수요를 보장해줘야 한다. 산업의 탈탄소를 위해서는 많은 기술들의 조기 상용화가 필요하고 시장이 성숙하기를 기다리기에는 한시가 급박하다. 정부의 녹색공공조달 개선은 기업으로 하여금 소규모 데모 플랜트라도 저탄소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이며, 시장에만 맡겨두어서는 요원할 저탄소 기술의 상용화 시점을 앞당길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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