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이투뉴스/박진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현대 세계사의 비가역적 전환점이다. 나아가 이 전쟁은 새로운 형태의 진행형 세계대전이다. 그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국경 분쟁이 아님은 발발 당시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과 유럽은 오래 전부터 우크라이나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추진을 통해 그들과 러시아 간 지정학적 균형을 깨뜨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고, 푸틴은 이를 러시아에 대한 실존적 위협(existential threat)으로 여겨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여러차례 경고했었다.

러-우 전쟁 이후 러시아와 미국, 유럽 간 갈등은 상호 경제제재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급기야 최근 우려했던 대로 러시아가 유럽의 핵심국가인 프랑스에 대해 천연가스 공급 중단을 통보했다. 프랑스 정부는 에너지 배급제 시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에너지와 자원은 국가경제와 국민생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생명줄이다. 지난 30여 년간의 세계화를 통해 에너지와 자원의 공급망이 상호 긴밀하게 연계돼 왔던 상황에서, 이 생명줄을 차단하는 것은 상대방의 경제를 마비시키고 상대방 국민들의 목숨을 뺏겠다고 선포하는 것 외에 무엇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러-우 전쟁이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 같은 세계화 이전의 국지전과 다르게 평가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또 하나 유의해서 살펴봐야 할 점은, 러-우 전쟁이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파생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공급이 제한된 에너지를 서둘러 확보하기 위한 에너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현재 가장 치열한 대상은 LNG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에 직면한 유럽 국가들은 이번 겨울 생존을 위해 LNG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통적인 LNG 소비국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 3대 천연가스 가격 지표(TTF, JKM, 헨리허브)의 급등은 글로벌 LNG 전쟁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그 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요 전력시장의 전력거래가격 급등, 그리고 전기요금의 급등으로 번져가고 있다. 급등의 의미는 20~30% 인상, 200~300% 인상 수준이 아니라, 1000% 수준이다. 만약 지정학적 갈등이 더욱 확대되고 심화된다면, 급등폭은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며, 이는 에너지의 수급을 조절하는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붕괴를 의미할 것이다.

더욱 우울한 점은, 천연가스 부족의 여파가 단순히(?) 에너지 부족이나 산업생산 급락에 그치지 않고 비료 생산 감축, 다시 말해 비료 부족으로 이어져 내년 이후 식량 위기로까지 번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세계 무역과 경제 질서, 그리고 세계 정치질서가 상호 동조하여 발작하듯 요동치고 있다. 여기에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FRB(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대대적 금리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사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 대규모 통화와 신용 팽창, 그리고 재정 확대를 통해 금융위기를 덮으려 했던 시도에 대한 대가를 하필이면 최악의 시점에 갚아야 한다. 미국의 금리 인상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빚으로 연명했던 국가들의 파산을 초래하기 시작했다. 최근 대규모 재정확대정책을 성장동력 또는 경기하강 방어수단으로 삼아온 우리나라 경제 역시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이다. 아직 충분해 보이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도 세계 경제의 침체에 따른 수출액 급감과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수입액 급증이 지속된다면 극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 여기에 공격적인 환율 방어를 시도한다면, 외환보유고 감소에 한층 더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결국 지난 30여 년의 에너지 유토피아는 그저 일장춘몽의 유토피아였다. 이제 세계 시민들은 에너지 유토피아 시대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유럽의 시민들은 온 몸으로 에너지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러-우 전쟁이 끝나면, 다시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러-우 전쟁의 교훈은 그 누구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있다. 독일 메르켈 전 총리는 너무 순진하게 푸틴을 믿었고 에너지 생명줄을 러시아에 맡겨 버렸다. 이 상황에서 독일이 생존을 위해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 받기로 결정한다면, 이러한 결정은 독일이 자신의 에너지 주권을 러시아의 손에 맡기는 것에 다름 아니며, 독일의 EU(유럽연합) 내 영향력은 급감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독일의 경제와 안보 주권을 약화시키고 독일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짓밟을 것이다. 독일, 나아가 유럽이 고난의 행군을 택한다면, 러시아는 유럽 시민들에게 고난을 초래한 적성국가로 재정의 되고 오랜 기간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더욱이,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정신은 탄소자원 개발이라는 비교적 손쉬운 해결책을 단호히 거부하려 할 것이며, 이는 제한적으로 공급되는 탄소자원을 둘러싼 끊임없는 국가간, 계층간 갈등을 촉발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러-우 전쟁 종식 이후 세계의 미래는 결코 끝나지 않을 ‘역사의 후퇴’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이제 막 태평천국의 시대가 스쳐 지나갔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유럽 시민들만큼 위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전력공사라는 방파제 덕택이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그 방파제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으며, 비교적 온건한 시나리오 하에서도 방파제의 파괴를 야기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도 많은 국민들이 쓰러진 한전을 대신해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EDF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복지를 떠맡기로 결정한 정부가 민생안정을 위해 실행해야 할 정책이 전기요금 인상 억제 하나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민의 생활고를 덜어주려는 여러 정책들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이며 국가 재정난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고금리 상황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국가 재정난은 더욱 가속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도 한때는 잘 나가는 나라였지 않은가!

물론, 토마스 홉스가 간파한 것처럼,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터이다. 그렇다면, 글로벌 에너지 위기의 시대, 세계대전의 시대, 더 크게는 역사의 후퇴 시대에 국가의 역할은 재정의되어야 한다 - 탄소자원의 결핍을 초래할 탄소중립의 시대에는 더욱 그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국가자본주의 또는 국가사회주의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국민들로부터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역량과 기회를 빼앗기 때문이다. 에너지 분야의 경우, 쩍쩍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한전을 희생양으로 내세워 현재 아무런 위기도 없는 양 분식하는 미봉책은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 그것은 국민들을 기만하는 행위다. 머지 않은 시점에 전력수급시스템의 붕괴라는 훨씬 큰 대가를 치를 수 있음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시다 총리는 올해 초부터 일본 국민들에게 절전과 에너지 절약을 간곡히 부탁해 왔다. 일본 정부도 에너지 부족에 대비한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왜 우리 정부에서는 이런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국가의 보살핌이 간절히 필요한 사회적 취약 계층을 예외로 하고, 국가는 국민들로 하여금 절대적 에너지 결핍이 도래하였을 때 생존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금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 진실은, 현재의 우리 에너지 시스템이 이제는 거대한 환상으로 드러난 안정적인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장 가혹할 정도로 급속한 변화를 실행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안타깝지만 국가가 모든 국민들을 항구적으로 돌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박진표 chinpyo.park@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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