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부터 무려 4년 동안 직책-업무 없이 허송세월 불가피
“정년이후 준비에는 도움, 너무 긴 기간이 문제” 한목소리

[이투뉴스] “처음에는 편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갈수록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답답하더라고요. 무엇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직원들과의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것 같아 힘들었습니다. 무려 4년 동안 특별한 업무 없이 시간 때우며 보내야 하는 이런 제도는 ‘비효율의 극치’이자 ‘미친 짓’이라고 봅니다”

한국지역난방공사 직원이면 누구나 57세가 되는 해에 임금피크 대상에 들어간다. 모든 직책과 업무를 내려놓고, 60세까지 만 4년 동안 그냥 직원이 된다. 임금도 해가 지날수록 줄어든다. 임금피크 직전 연봉 3년치를 4년에 걸쳐 나눠 받는다. 김성회 사장 시설인 지난 2015년 도입한 임금피크제도에 따른 것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기업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도록 권고했다. 말은 권고였으나 사실은 의무였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괸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당시 근로자 정년이 60세로 늘어나면서 혜택만 누리지 말고 일부는 내려놔야 한다는 여론이 커 대다수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이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기간은 2년이 많았고, 3년짜리도 일부 있었다. 산업부 산하기관 중 한난만이 유일하게 4년짜리를 택했다.

사실 한난은 그 이전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모범기관이었다. 1급 부서장에 한해 3년씩 운영했다. 조직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많은 혜택을 누린 선배(40대 중후반 1급 등 빠른 승진)들이 후배를 위해 길을 터줘야 한다는 의견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제도 위에 정부가 독촉하자 1년을 얹어 4년을 만들었고, 1급이 아닌 전 직원으로 대상을 확대(3급 이하는 차등적용)했다.

이렇게 완성된 한난의 4년짜리 임금피크제가 본격 시행되자 내부에서는 많은 불만이 쏟아졌다. 도입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지만, 실제 적용을 해보니 여파가 훨씬 컸다. 당장 5∼10명의 고급간부가 매년 임금피크를 맞다보니 부서장 자리는 크게 늘었다. 하지만 임금피크에 들어가더라도 직위(1∼2급)를 유지해 승진자는 생각보다 늘지 않았다. 별로 많지 않던 2급 처장·지사장이 대폭 증가한 것이다. 머잖아 3급 부서장도 등장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당사자들은 더욱 못 견뎌한다. 어느 순간 직책도 특별한 업무도 없는 조직원이 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박탈감이 예상보다 크다고 말한다. 2년 동안은 별도의 방이 제공되나, 2년이 지나면 사무실도 여러 명이 같이 써야 된다. 형식적으로는 파트별로 보좌역, 자문역 등의 역할을 맡긴다. 하지만 ‘결재라인’에서 빠져버려, 혼자 일해야 한다. 실제 각 지사 빈 사무실로 출근은 하지만, 그냥 시간을 때우며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들 스스로 ‘한량’이나 ‘자연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부는 우울증이 와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약을 먹기도 한다는 전언이다.

물론 임금피크를 맞은 모든 사람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의 빡빡했던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즐기기도 하고, 정년이후 닥쳐올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섭섭하긴 하지만 후배들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도 적잖다. 하지만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이 있다. 임금피크제 도입취지나 필요성은 인정하는데, 4년은 너무 길다는 것이다.

임금피크를 보내고 있는 한 간부는 “나이 57이면 한 참 일 할 때다. 그동안 일하면서 쌓은 노하우가 얼마나 많겠느냐. 하지만 어느 순간 바보가 돼야만 버틸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수 십 명이 4년을 이렇게 보내야 한다. 국가적으로도 회사 측면에서도 너무 아깝지 않은가”라며 개선 필요성을 역설했다.

4년짜리 임금피크제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한난에서도 제도개선을 검토하고 있다. 일부 노동조합 집행부도 개선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제도를 도입한 만큼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젊은 직원도 만만치 않은 등 경영진-간부-노조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는 사이 '현대판 고려장'을 둘러싼 내부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채덕종 기자 yesman@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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