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미루다 동시다발 악재 허둥지둥
전력수급·계통·시장 전 분야서 위기론

[이투뉴스] 전력산업이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앞 신세다. 전력수급‧계통‧시장 등 전 분야에서 심상치 않은 이상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산업을 둘러싼 외부환경은 크게 달라졌는데, 변화를 거부하고 임기응변식 관치(官治)에 의존해 온 대가다. 도미노처럼 전 산업으로 위기가 확산돼 소비자인 국민이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란 경고가 나오고 있다.

10일 전력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애초 일정대로 연내 9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정부안을 수립한다는 방침이지만 아직 정책 방향조차 확정하지 못했다. “할 일은 쌓여 있는데,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는 게 이 계획에 관여하는 위원진의 전언이다.

이번 9차 계획은 방향전환에 초점을 맞춘 8차 계획과 달리 정책 이행성을 담보할 첫 실행계획으로서 적잖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기폐쇄 방침이 내려진 노후석탄 대체계획은 물론 온실가스 감축목표 정합성 확보를 위한 전력믹스 재조정과 재생에너지 확대수용을 위한 통합 송전계획 등도 다뤄야 한다.

하지만 계획 주체인 정부는 이번 계획의 중요성이나 시의성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하다는 게 안팎의 관전평이다. 정부안을 보고 받을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당국 관계자는 “올해 안으로 정부안을 만든다 해도 상임위 보고와 환경부 사전환경영향평가 일정까지 감안하면 내년 상반기 확정‧발표도 빠듯할 수 있다”면서 “위킹그룹별 논의와 조사는 일정대로 정상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반면 한 민간위원은 “여러차례 회의에 참석했는데, 원론적인 얘기나 겉도는 얘기뿐이다.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든다”고 잘라 말했다. 이전 계획에 참여한 또다른 전 민간위원은 “계통이 없어 접속을 못하는 1MW 이하 태양광만 7GW가 넘는다는데 앞으로 계통보강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재생에너지 변동성은 어떻게 안정화하겠다는 건지 들어본 적 없다”면서 “자꾸 책임을 뒤로 미루는 수급계획이 전력수급과 계통안정을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력시장의 기류도 심상치 않다. 연료비 원가 상승, 온실가스 대응, 친환경 전원 확충 등으로 발전원가는 지속 상승하는데, 전기요금 조정 권한을 틀어 쥔 정부는 요금현실화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최근 한전은 국제 신용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을 강등 당한데 이어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작년분 적자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기도 했다. 한전은 나스닥 상장사로, 외국인 지분이 27%에 달한다.

이에 한전은 이달말 이사회를 열어 전기료 특례할인 폐지 등 전반적인 요금개편 로드맵을 논의키로 했으나 어디까지나 내부협의다. 정부는 전반적인 요금제 개선과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을 표하면서도 시기나 수준 등은 함구하고 있다. 정치적 부담 때문이다. 한전은 현재 주택용 필수사용량 공제, 원가 이하 산업용 경부하 요금, 농업용 교차보조, 각종 할인요금 등으로 연간 3조원 가까운 손실을 보고 있다.

이중 일부라도 시급히 개선책을 마련해 일단 숨통을 튼 뒤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해 변동성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전 고위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탈원전 때문에 전기원가가 오르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에너지전환 때문에 원가가 오르는 것은 사실 아니냐”면서 “이대로 가면 앞으로 벌어질 일 때문에 후대에 큰 짐을 넘길 수 있다. 모두 한발짝 물러서 중지를 모아야 파국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전권을 행사하는 규제시장이 자맥질을 거듭하는 산업 생태계에도 적신호가 들어오고 있다. 해외서 파격적인 단가하락이 본격화 된 재생에너지 산업은 국내서만 유독 고비용 구조가 고착화 되고 있고, 그마저도 왜곡된 전력시장단가(SMP)와 REC정산금으로 자생력을 잃고 있다. 중소발전사 관계자는 "신재생에너지든 신산업이든 산업부, 한전, 전력거래소, 한전발전사, 에너지공단만 존재하는 산업이다. 에너지전환정책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정책 빈틈을 노리는 자만 성공하는 산업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현행 전기요금 체계의 가장 큰 문제는 한전 재무구조 악화가 아니라 에너지신산업 출현과 활성화를 방해함으로써 소비자들의 후생이 악화되고 신산업이 고용창출과 성장을 돕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당초 의도한 정책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전력산업과 요금규제에서 과감히 손을 떼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진표 전력정책 전문변호사는 "한국 전력산업은 시대착오적 규제와 불합리한 정부관여 확대 등 퇴행적 행태로 기술자본의 혁신과 축적, 금융자본 유치가 불가능한 상태"라며 "이대로 가면 전력산업 도태와 몰락을 피할 수 없다. 전기위원회의 독립규제기관화와 한전 지배구조 정상화 등으로 자유와 법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티겠나. 카드 돌려막기나 마찬가지 상황"이라로 지적했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마치 연료비 연동제가 전기요금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 관리를 정부가 다시 맡는 방식이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면서 "선진국처럼 공공요금을 정치적 결정으로부터 분리시킬 독립규제기관 등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대통령이 내려놔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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