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용 中 제조사에 치이고 ESS는 화재 후 방치
전문가 "국가 주도 리더십 부재, 재기·육성책 절실"

▲국내 한 배터리제조사 생산라인에서 기술진이 각형전지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련없음)
▲국내 한 배터리제조사 생산라인에서 기술진이 각형전지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련없음)

[이투뉴스] “국내 배터리회사 전기차용 수주고가 수백조원이라고요? 글쎄요. 이미 승부는 1년 전쯤부터 중국으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앞으로 시장이 커지니까 굶어죽지는 않겠지만, 주력기업 다 놓치고 나머지 주워 먹는 식이 될 겁니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시장의 주도권도 안이한 대응으로 놓친 지 꽤 됐습니다.”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한국의 미래 먹거리가 될 것이란 배터리·ESS 산업에 경고등이 켜졌다. 전기차시장은 가격과 기술경쟁력을 앞세운 중국기업의 파상공세에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고, ESS시장은 지난 2년간의 연쇄 화재로 붕괴된 산업 가치사슬과 정책 동력을 재건하는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어서다. 이대로가면 해외시장은커녕 안방시장 수성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전력업계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제조사들은 LG화학이 올해 1분기 세계 전기차시장에서 점유율 1위(삼성SDI는 4위)를 달성했다는 소식에 잠시 고무된 모습이지만 속으론 좌불안석이다. 코로나19로 주력시장인 미국과 유럽시장이 지속 위축되는 가운데 하반기 중국시장이 회복될 경우 언제든 CATL, BYD, AESC 등 현지메이커에 그 자리를 내줘야하기 때문이다.

한 배터리시장 전문가는 “어쩌다 잠깐 1등을 했다는 게 뭔 의미냐. 지속성이 관건인데 2~4분기 전망은 밝지 않다”면서 “국내 배터리제조사들 고객이란 BMW는 라인업이 CATL(중국)로 점차 바뀌고 있고, 폭스바겐과 GM도 마찬가지다. 전체 시장규모가 커지는데 따른 수혜는 분명 있겠지만, 메이저 벤더를 모두 경쟁사에 빼앗기고 있다는 건 심각한 얘기”라고 말했다.

실제 가격과 기술경쟁력을 앞세운 해외 경쟁사들의 행보는 심상치 않다. 중국 최대 배터리제조사인 CATL은 최근 기존 제품대비 수명을 8배나 늘린 배터리를 개발, 언제든 이를 양산가능하다고 공언한 상태다. 그런가하면 세계 1위 전기차메이커인 테슬라는 기존 파나소닉과의 협업라인을 CATL로 확장하며 해외 ESS시장 진출을 벼르고 있다. CATL 배터리가격은 국산의 60~8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외 ESS시장동향에 정통한 전문가는 "아직 국내 배터리기업들이 정신을 못 차렸다. 삼성, LG 배터리만 찾던 플루언스 등 유수 ESS EPC기업들이 내년 이후 물량을 CATL로 채우기 시작했다. 배터리의 핵심경쟁력인 에너지밀도와 가격에서 크게 뒤처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 제조사들은 중국 배터리기업이 자국 보조금시장에 의존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절하해 왔다.

북미 전력시장에서 ESS사업을 영위하는 M사 한국계 임원은 "중국 배터리기업들이 저렴한 노동력과 보조금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규모의 경제로 이미 한참 노하우를 쌓았고, 기술수준도 한국기업을 한참 앞서는 수준”이라며 “국산 보호정책도 좋지만 가격과 기술로 그들 스스로 중국기업을 이겨내도록 하지 못하면 한국 배터리 산업의 미래 희망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미·중 갈등으로 현재 주요 미국 ESS 프로젝트가 중국산을 배척하면서 삼성SDI나 LG화학 등의 국산 배터리가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결국 중국메이커들의 기술 및 가격경쟁력에 기존시장마저 잠식당할 우려가 높다. 한국의 강점인 정보통신(ICT) 기술과 ESS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시장의 활로를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그는 “과거 반도체 산업을 육성할 때처럼 국가 주도의 리더십은 전혀 보이지 않고, 한국기업만의 독보적인 기술격차도 이젠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면서 “ESS없이는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확대와 신산업 개발에 한계가 있다. ESS화재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극복할 과제이지 근본적 한계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런맥락에서 산업계는 정부가 배터리·ESS 산업을 더이상 방치해선 안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앞서 산업통상자원부는 ESS화재 이후 태양광연계형 보조금(REC) 삭감을 결정한 상태며, 후속 산업부양책 발표도 미루고 있다. 민간기업 한 관계자는 "시장은 쑥대밭이 됐는데, 정부는 진즉에 마련하고 공표했어야 할 정책을 미루기만하다가 외산업체들이 무혈입성할 기회만 만들어줬다"면서 "국내시장을 CATL과 테슬라 하도급으로 만들생각이 아니라면 시의적절한 육성책과 경쟁력 확보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A 배터리시장 전문가는 "삼성과 LG, LG산전과 같은 대기업만 있다고 이 산업의 경쟁력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면서 "대기업과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사이 ESS 서플라이체인이 모두 망가졌다. 양쪽이 모두 주인의식을 갖고 덤비지 않으면 앞으로도 어렵다"고 말했다. ESS 연구기업 한 임원은 "ESS는 시스템으로, 배터리는 그 구성품의 하나일 뿐"이라며 "전기설비, 화재예방, PCS(전력변환장치), BMS(배터리관리시스템) 등의 연관산업을 하나의 생태계로 보고 육성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에너지스타트업 한 관계자는 "ESS는 수요반응(DR), 가상발전소, 재생에너지 유연성 확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디지털화 시대의 핵심기술"이라며 "(정부가)정적규모로 정책시장을 만들어주면서 배터리기업의 과감한 투자와 기술혁신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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