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절감효과 측정 불가…무조건식 절약지침

지난 4일 밤 11시20분 서울 지하철 삼각지역.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한 딸을 만나고 서울 약수동 집으로 돌아가던 차길순(82ㆍ서울 중구)할머니는 환승 통로에 들어서자 앞이 까마득해졌다. 어림잡아 200미터에 달하는 수평에스컬레이터(무빙워크)가 '에너지절약을 위해 운행을 중지합니다'란 안내와 함께 멈춰서 있었기 때문이다.
 
"눈도 어둡고 귀도 안 들려 먼데는 못 간다"는 팔순의 이 할머니는 하는 수 없이 잔뜩 굽은 허리를 간신히 곧추 세우며 무작정 환승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지하철 4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삼각지역의 플랫폼 간 거리는 계단을 포함 약 250미터. 웬만한 버스정거장 한 구간 거리다.

 

신경통으로 약을 달고 산다는 이 할머니는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인파를 두 번이나 먼저 보내고 나서야 가까스로 갈아탈 역에 도착했다. 차할머니는 숨을 고르며 "가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에스컬레이터가)서 있어 걷는 게 힘들다"면서 "한번 걷고 나면 무릎하고 허리가 제일 쑤신다"고 말했다. 

 

◆공포의 환승역=지하철공사ㆍ도시철도공사가 에너지절약을 이유로 주요 환승역의 엘리베이터를 시간제로 운행하면서 애꿎은 노약자가 불편을 겪고 있다. 이들 역은 짧게는 100미터에서 최대 400미터에 이르는 장대 환승 구간을 포함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몸이 불편한 이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지하철 5~8호선을 맡고 있는 서울도시철도공사가 관리하는 환승역은 총 38개 역사다. 이중 환승 거리가 150미터를 초과하는 장대환승역은 종로3가의 최장 312미터를 비롯한 동대문운동장 234미터와 왕십리 198미터 등 총 12개역이다. 
 
이에 대해 강원명 도시철도공사 설계팀 대리는 "1기(1~4호선) 지하철을 건설하면서 2기 건설계획이 감안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철이 더 깊숙이 지나거나 멀어지면서 환승 거리가 길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들 역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가 지하철 승객이 몰리는 시간대에만 운전된다는 사실이다. 6호선 삼각지역의 경우 환승 구간 무빙워크는 출근시간대인 오전 7시30분~10시 30분과 퇴근시간인 4시30분~10시까지만 제한적으로 운행된다. 물론 목적은 에너지절약이다.
 
이 때문에 이 시간을 지나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노약자나 장애인이라도 어쩔 수 없이 긴 구간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게다가 에스컬레이터가 멈춰서는 이 시간대는 역으로 출퇴근을 피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는 노인층과 장애인의 이동이 가장 많은 시간대다.

 

◆절약지침 '어쩔 수 없어'=이에 대해 해당 역의 관계자는 "위에서(도시철도공사 차원에서) 공문이 내려오고 지침이 전달돼 어쩔 수 없다"면서 "에너지절약을 위해 러시아워 시간대에만 에스컬레이터를 운행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각 역은 별도로 전기사용료를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공사 차원에서 한전에 일괄 부담하고 있기 때문에 역 별로 전기료를 산출하거나 절감량을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에스컬레이터 운영은 자체 지침이 아니라 공사차원의 절약시책이기 때문에 아무리 장대 환승 구간이더라도 역 마음대로 자율운전을 할 수 없다.

 

삼각지역의 관계자는 "만약 노약자의 이동이 불편하면 역무실로 연락을 줄 경우 우리가 모시러 가면 된다"면서 "에너지 절약 차원이기 때문에 우리도 딱히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시철도공사는 "각 역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책임을 해당 역으로 떠밀고 있다. 공사의 한 관계자는 "에스컬레이터 운영은 시간을 봐 가면서 해당 역이 탄력적으로 적용할 일"이라며 "에너지절약을 위해 일괄적으로 지침을 내린 것도 없고 운영은 승객을 봐 가며 각 역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했다.

 

◆에너지절감효과 정확히 알 수 없어=도시철도공사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한 달 동안 공사가 한국전력에 지급하는 전기료는 11월 기준 29억~30억원 정도. 이중 절반 가량이 전동차 구동에 사용되고 나머지 절반은 각 역사의 시설운영과 설비에 사용된다.

 

그러나 에스컬레이터 시간제 운영을 통해 얼만큼의 에너지절감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집계된 바 없다는 게 공사 측의 설명이다.

 

도시철도공사 전력팀의 한 관계자는 "각 역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가 길이와 경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에너지 절감량을 일괄적으로 산출하기는 어렵다"면서 "다만 전동차는 약냉난방차 운행을 통해 절약이 가능하고 역사는 전등기구나 에스컬레이터 시간 조정을 통해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절약시책이 시행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성자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간사는 "서울 지하철의 경우 추락사고 위험이 큰 리프트가 많아 장애인 안전에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에너지절약도 좋지만 환승 구간의 무빙워크나 에스컬레이터는 센서를 부착해 전력량을 조절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이투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