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부대표(기후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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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투뉴스 칼럼 / 고은] 한국에서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도 노후한 석유화학과 정유설비를 줄이겠다는 구조조정을 예고하고 나섰다. 일본에서도 향후 2년안에 약 190만톤의 에틸렌 설비 폐쇄를 검토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도 설비 매각 검토에 들어갔다. 철강산업도 중국에서는 이제 증설을 멈추었고, 한국에서는 가동을 줄이고 있다. 

석유화학과 철강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수출을 떠받쳐온 핵심 산업이었지만, 지금 전 세계가 공급과잉이라는 공통의 문제 앞에서 고통스러운 재편의 시간을 맞고 있다. 사실 이는 한국만이 구조조정에 나선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인데, 단순히 설비 합리화의 속도뿐 아니라 누가 먼저 새로운 산업으로 재편할 수 있느냐를 두고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때 ‘석유화학의 심장’으로 불렸던 전남 여수는 “지나가던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던 호황의 도시였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산업 생산과 세수 증가세는 둔화되었고, 포항 역시 주요 제철소의 일부 가동 중단과 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지역사회는 “우리를 먹여 살릴 다음 산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산업 전환과 지역 전환은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같은 문제가 되었다.

기업의 자발성에만 맡기지 않고 정부가 드디어 구조조정이라는 첫 스텝을 내디딘 것은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의 전략은 설비 감축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산업과 지역에 새로운 전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이다.

참고할만한 성공한 사례는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는 1970~80년대 철강업 쇠퇴로 대규모 실업과 도시 공동화를 겪었다. 하지만 카네기멜론 대학, 피츠버그 대학 등 지역의 우수한 연구·교육기관을 기반으로 의료, 생명과학, 로봇공학 등 신산업으로 전환했다. 지방정부는 장기 로드맵을 수립했고, 기업, 대학, 지역사회, 정부가 방향에 합의하며, 인재 유치와 기술 이전, 창업 생태계 조성을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오늘날 피츠버그는 ‘스마트 제조와 의료 혁신의 허브’로 불리며, 과거의 쇳물 이미지 대신 첨단 연구와 창의 산업의 상징이 되었다.

스웨덴의 룰레오(Luleå)와 보덴(Boden)도 전환을 추진 중이다. 재생에너지 접근성, 인근 광산 자원, 항만 인프라를 활용해 보덴에는 세계 최초 상업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공장이 2026년 가동을 목표로 건설되고 있다. 룰레오의 고로는 폐쇄를 앞두고 있으며, 그 자리에 전기로가 들어선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유럽 최대 석유화학·정유 허브였다. 하지만 이제 기존 부두, 배관, 저장시설을 활용해 그린수소, e-메탄올, 바이오연료 클러스터로 전환 중이다. 2030년까지 150억 유로를 투자하고, 2022년부터 3년간 이미 50억 유로 규모의 프로젝트가 최종투자결정(FID) 단계에 들어섰다.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착공, 계약, 금융 조달이 실행되고 있다.

세 사례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첫째, 신산업은 변화하는 시장 환경을 반영한 청정 제조업이어야 한다. 미국 러스트벨트는 트럼프 행정부 1기부터 시작된 고율 관세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일자리를 되살리지 못했고, 오히려 일자리는 선벨트(sunbelt)라 불리는 텍사스, 유타 주 등으로 이동하며 지역 격차만 커졌다. 반대로 피츠버그는 변화하는 시장을 분석해 미래 수십 년을 지탱할 신산업을 찾아냈고, 네덜란드와 스웨덴 역시 장기적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산업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둘째, 인력 유치와 기술 개발을 뒷받침하는 교육·연구 거점이 필수다. 피츠버그의 대학·연구소는 신산업의 핵심 인력을 공급했고 산업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셋째, 정부와 지자체의 명확한 비전과 신속한 투자 집행이 필요하다. 로테르담은 2030년까지 투자 목표를 제시하고, 3년 만에 50억 유로 규모의 프로젝트를 FID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보덴과 룰레오도 재생전력, 철도, 항만 확충이 빠르게 진행 중이다.

넷째, 지역의 이해관계자들이 전환 방향성에 합의하고 이를 실행으로 연결하는 구조가 장기적 성공을 보장한다. 피츠버그에서는 대학이 주도하여 공공과 협력하여 기술센터를 만들었고, 보덴의 전환은 기업이 주도했지만 지역사회와 국가정책이 단일한 마음으로 협력했다고 한다.

구조조정이라는 결정을 내렸다면 어떤 전환을 이루어야 할 것인지가 제시될 시점이다. 산업 전환은 특정 업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 과제이며, 산업과 지역이 함께 구상해나가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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