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전문가들 “저유가는 전력시스템 정상화의 호기”
전기료 인하 논의 성토장 된 전력산업연구회 세미나

(왼쪽부터) 김발호 홍익대 교수, 김영산 한양대 교수, 신정식 아주대 교수, 신중린 건국대 교수,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강승진 산업기술대 교수, 온기운 숭실대 교수, 손양훈 인천대 교수, 조성봉 숭실대 교수.

[이투뉴스] 유가 하락분을 전기요금에 즉각 반영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최근 요금인하 논의와 관련, 전력·에너지 학계 측이 ‘시의적으로 부적절하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배출권거래제 등 인상요인도 산적해 있어 실질 인하여력을 면밀히 따져봐야 하는데다 시장매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정치적 판단으로 요금을 내리면 더 큰 부작용이 초래될 것이란 지적이다.

오히려 학계는 현 저유가 상황을 비시장적 전력시장이 야기한 각종 문제를 정상화하고 왜곡된 전력시스템을 바로잡는 호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전력산업연구회가 ‘저유가 시대, 전기요금 내려야 하나?’를 주제로 11일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전력·에너지분야 주요 교수진이 전기료 인하 논의의 부적절성을 성토하며 제시한 의견들이다.

다만 학계는 “원가 변동요인을 요금에 반영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외부 변동요인이 도매요금이 아닌 소매요금으로 반영되는 시장정상화가 더 시급하다는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이날 세미나는 연구회의 기존 정례 행사와 달리 10여명의 학계 패널과 전력산업계 일부 인사 등 20여명만이 참여한 가운데 긴급 좌담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작년 12월 대통령의 유가 인하분 공공요금 반영 발언 이후 “짧은 기간 유가가 내려갔다고 당장 전기료를 내려야 한다는 비정상적 얘기가 나오고 있다”(신중린 회장. 건국대 교수)며 학계 차원의 적기 의견개진 필요성이 제기된 터였다.

하지만 한전과 발전자회사, 에너지경제연구원 등 공공기관은 큰 틀에서 학계와 인식은 같지만 공개석상에서 청와대 지시사항을 거론하기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패널토론 제의를 물린 것으로 전해졌다.

(왼쪽부터) 강승진 산업기술대 교수, 온기운 숭실대 교수, 김영산 한양대 교수

우선 강승진 산업기술대 지식기반기술·에너지대학원 교수는 ‘배출권거래제와 전기요금’이란 제하의 주제발표를 통해 “전기료에서 연료비 비중이 크지만 전력공급과 관련된 각종 정책비용이 새로 생겨나거나 증가되고 있다”며 원가 증감요인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주문했다.

원가 인상요인으로 지목된 정책은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를 비롯해 발전용 유연탄 과세 신설, 지역자원시설세 인상, 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 확대(RPS), 송변전설비주변지원법, 원전 안전관리 강화 비용 등이다.

특히 올해부터 시행된 배출권거래제의 경우 경기에 따라 발전업종 배출권 수요급증으로 가격이 급등할 수 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배출권 시장가격의 3배에 달하는 과징금을 물 수 있어 향후 전기료 인상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강 교수는 “정부는 배출권거래로 인한 상승요인을 전기료에 최대한 반영한다는 입장이지만 아직 비용을 어떻게, 얼마나 보전할 지 룰이 정해지지 않아 모두 관망중”이라며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한편 전기료 원가연동제 등을 통해 합리적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기운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어진 ‘저유가와 전기요금’이란 주제발표에서 유가하락으로 한전의 구입전력비는 일부 감소하나 한전의 열악한 재무구조, 실질전기요금 하락세, 유가 재반등 가능성 등을 함께 고려하면 당분간 요금인하는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온 교수는 “최근 전기료 인상으로 한전의 원가회수율이 상승해 2013년에는 당기순이익도 흑자전환했지만 같은해 연결기준 부채가 105조원에 이를 정도로 재무구조가 열악하다. 요금을 내릴 경우 개선조짐을 보이던 경영지표가 다시 악화되고, 이는 곧 발전자회사로의 부담 전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동안은 정치적 요소가 전기료 조정에 우세하게 작용해 왔지만 앞으론 국민경제에 미치는 중요성에 비춰 경제논리에 입각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장)가 좌장을 맡은 종합토론에선 "지금은 전기료를 인하할 때가 아니라 그동안 방치했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시장시스템을 바로잡을 때"란 지적이 쏟아졌다.

(왼쪽부터) 손양훈 인천대 교수, 신정식 아주대 교수, 조성봉 숭실대 교수 

김영산 한양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한전 당기순익이 5조원을 넘었는데 전기료를 안 내린다는 비판여론이 있지만, 우선순위가 있다”고 운을 뗀 뒤 “우선은 빚을 갚아야 하고, 송배전설비 투자 등 밀린 핵심투자와 미래투자가 (요금인하보다) 더 시급하다”며 요금 인하론을 일축했다.

김 교수는 “예비력이 확충돼 수급에 여유가 생겼는데, 이럴 땐 그동안 하지 못한 제도개선의 호기”라면서 “14년간 그대로 유지한 용량요금(CP) 현실화와 가혹한 주택용 누진요금제 등은 반드시 손봐야 할 일”이라고 지목했다.  

최근 국책연구기관 원장직을 사임하고 학계로 돌아간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前 에너지경제연구원장)도 특유의 직설화법을 통해 전력시장의 근본적 개혁 필요성을 설파했다.

손 교수는 “한전이 10조원에 본사를 팔고 당기순익이 5조원이나 된다니까 상황이 호전된 것으로 보는데, 아직 부채가 105조원이고 이자부담도 막대하다”면서 “이런 와중에 도매시장의 전력가격(SMP)이 급락해 한전 자회사가 아닌 시장 참여자들은 엄청난 적자를 보게 될 텐데, 그런 문제를 다 외면하고 요금부터 내리자는 것은 순서에 맞지 않는다”고 꾜집었다.

손 교수는 전기료 인하 명분이 된 저유가에 대해서도 “하루에도 9%씩 유가가 등락하는 불안한 시장인데, 전기료를 그때그때 조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더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 더 급변할 외부 정세변화와 국내 전력시스템이 단절돼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공기업 독점의 전력시장은 갈라파고스 수준으로, 수급이 안정화된 지금이야말로 전력시스템을 바꿀 호기”라면서 “에너지분야에서 구조개혁을 추진하려면 이런 것부터 풀어야 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상당히 오랜기간 그런 문제를 안고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주요 패널들이 종합토론을 벌이고 있다.

신정식 아주대 교수는 에너지정책의 일관성 확보 측면에서라도 현 시점에서의 전기료 인하는 부적절하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신 교수는 “에너지정책 선진국의 원칙은 일관성이다. 저에너지가격 정책으로 전력을 낭비했다는 지적받고도 불과 (유가가)수개월 내렸다고 요금을 인하하면 에너지사업자와 소비자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금이 저렴하면 절대 에너지효율향상의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저에너지가격이 에너지효율산업 발전을 저해해 온 것”이라며 “정부 한쪽에선 효율을 높이겠다고 하고, 다른쪽에선 요금 인하 등을 거론하는 등 정책 일관성 문제가 심각하다. 우리도 시장이 작동해 소비자와 공급자가 가격을 갖고 움직이는 그런쪽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대 천연가스(LNG) 수입국중 하나인 일본의 원전 확대로 국제 LNG가격이 추가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제시하며 “중요한 것은 연료가격이 아니라 자본시장을 열어 놓고 국제 룰을 따르지 않는 정부의 과잉 개입”이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한전의 경우 강원권 765kV 송전선로 신설과 수도권 고장전류 해소를 위한 HVDC 보강, 배전변압기 용량 증대 등 엄청난 네트워크 개선비용이 필요한데, (정부는)이런 부분은 신경을 쓰지 않고 연료값만 본다. ‘기름값을 들여다 보겠다’던 과거 MB정부와 다를 게 없다”고 몰아붙였다.

이승훈 서울대 교수가 손양훈 교수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그는 “이런식의 공공요금 규제는 자본시장을 열어놓고 국제 룰을 모르쇠하는 것”이라며 “지금 산업부가 할 일은 연료가격이 떨어졌을 때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잘못된 교차보조를 시정하고 에너지가격에 대한 시그널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이승훈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배출권거래제 등 발전원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소매요금에 반영하는 매커니즘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시장기능을 회복하는 근본적인 제도개편이 필요하다”면서 “저유가는 전기료 인하의 기회가 아니라 우리 전력산업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를 해소할 기회”라고 정리했다.

이 교수는 대통령의 전기료 인하 발언 배경과 관련, “요금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변에서 그렇게(전기료를 내려야 한다고) 조언하는 참모가 있다면 그것이 문제”라며 “정부가 전기료를 책임지는 시스템은 자가당착적일 수밖에 없다. 해답은 시장”이라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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