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경 경북대학교 전기공학과 부교수(공학박사)

▲한세경경북대학교전기공학과 부교수(공학박사)
한세경
경북대학교
전기공학과 부교수
(공학박사)

[이투뉴스 칼럼 / 한세경]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생각의 범주가 언어의 틀을 벗어나기 어려움을 꼬집는 말이다. 그런데 이 금언을 돌려 말하면, 언어라는 것은 존재를 개념으로 포착한다는 말이 된다. 즉 모호하거나 잘 인식되지 않는 현상에 언어를 접목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개념이 생성되며 현상에 대한 이해가 간결해지면서도 명확해진다. 

배터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셀밸런싱이라는 단어를 비교적 친숙하게 인지하고 있다. 바로 배터리 셀간의 편차를 BMS를 통해 해소하는 것을 일컫는 말인데, 언뜻 이 단어를 통해 머릿속에 생성되는 개념은 모든 셀의 편차가 셀밸런싱이라는 작동기제를 통해 해결된다는 인상을 남긴다. 사실 셀 간의 편차 그 자체보다는 그 발생 메카니즘이 훨씬 중요한 것이라, 셀밸런싱은 시스템의 관점에서 ‘누락’이 많은 개념이다. 가령 단순히 충전량(SOC)의 편차라면 셀밸런싱으로 해소되겠지만, 내부단락의 원인이 되는 덴드라이트 발생 등으로 셀 용량 자체의 편차가 발생하는 경우, 셀밸런싱으로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도 않을뿐더러 이것만 믿고 지속적으로 방치할 경우 화재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차의 발생 원인을 명확히 구분하는 용어가 없다 보니 셀 밸런싱만 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언어가 현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오류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 칼럼에서 배터리 셀 간의 편차를 가역적 비균질(Reversible Heterogeneity, RH)과 비가역적 비균질(Irreversible Heterogeneity, IH)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굳이 창안하여, 현상을 보다 정확히 포착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사실 기계장치는 고장과 정상의 경계가 매우 명확한 편이다. 통상 기계장치는 항복강도 이상의 힘이 가해지면 소위 소성변형이라는 게 발생하며 손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상태가 발생하게 되면 대게 정상적인 상태와는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 배터리에서는 이러한 소성변형이 앞서 언급한 IH에 해당하는데, 문제는 이 상태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암과 같이 배터리 스트레스와 결부해 확률적으로 발생하는데다 RH와 구분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기계장치에서는 소성변형이 발생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운용자체가 어렵다보니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후속조치를 요청할 수 있지만, 배터리에서는 IH가 발생하더라도 (소비자가 느끼기 어려운 수준의) 성능저하가 발생할 뿐 평시와 같은 운용이 가능한 경우가 많아 이를 방치하여 화재사고 같은 파국적인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이의 그레이존이 넓은 것이 문제 양상의 핵심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화재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그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셀의 비가역적 편차, 즉 IH 상황을 인지하는 것은 제조사나 소비자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이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면밀한 셀 데이터 분석 등이 필요하다 보니 BMS가 아닌 별도의 클라우드 시스템을 통해 분석을 진행하는 소위 BaaS(BMS-as-a-Service) 도입을 이미 많은 제조사들이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그레이존이 넓고 진단에 대규모 정보가 필요한 이러한 상황이 제조사와 소비자 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사실 이미 우리는 오래전부터 비슷한 사례를 겪어왔다. 자동차가 기계장치로만 이뤄져있던 80년대 이전 차량에서는 고장도 많이 발생했지만 제조사와 소비자 간에 그 원인 자체를 두고 분쟁이 크게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80~90년대로 들어서면서 차량제어에 다양한 전자장치들의 도입이 본격화되었고, 그 시점 이후 발생하는 사고나 고장에 있어서는 그 원인이나 귀책을 다투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급발진 사고인데 원인 규명 단계에서부터 제조사와 소비자 간에 정보의 비대칭이 발생하다 보니 운전자 과실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이 현실인데, 이를 해결하고자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EDR이라는 사고 데이터 레코더 장치의 장착이 의무화되었지만 이 데이터 역시 제조사가 독점하고 소비자에게는 아주 제한적이거나 보수적으로 오픈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배터리 진단, 특히 BaaS 기반의 진단이 제조사 중심으로만 일어날 경우 이러한 상황은 더욱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EDR은 사고가 발생하는 그 시점의 데이터만 분석하면 되지만 BaaS 기반의 배터리 진단은 훨씬 장기간에 걸친 면밀한 진단이 이뤄져야 하는 데다 소위 그레이존이 넓다 보니 빅데이터를 면밀하게 진단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전문성이 모두 갖추어져야 해서, 소비자의 당사자적 지위가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는 업계의 자체적인 도덕성과 시장의 흐름에 맡겨둘 문제가 아니다. 정부당국을 통한 데이터의 공공화나 외부적 전문기관 개입의 제도화가 이뤄져야 하고, 이의 실질적이고 조속한 시행을 위해선 소비자부터가 이러한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깨어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신품 액정 모니터에 불량픽셀이 한두 개 있는 경우와 수백개의 배터리 셀 중 한두개만 노화도가 심한 경우는 제조적 관점에서는 동일한 불량이다. 다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량으로 승인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부인될 뿐이다. 더 심각한 위험양상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EV와 같은 고정밀 대형 배터리어플리케이션에서 소비자 스스로가 자신의 배터리 불량여부를 가려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결국 위험은 소비자의 몫이다. 위험을 알려주는 데이터가 있다면 이는 당연히 소비자의 몫이고, 이를 통해 얻어지는 정보도 소비자의 몫이어야 한다. 미국의 저명한 환경문학가 레이첼카슨은 다양한 환경문제를 인식하는 것에 대해 “참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라고 갈파한 바 있다. 알아야 하는 권리가 환경문제에 대해서만 보장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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