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투뉴스] 지금처럼 무더웠던 몇해전 여름밤의 일이다. 가입하면 한달 시청이 무료라길래 어떨결에 한 OTT를 설치했다. "유일한 단점은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것." 한줄평이 마음에 들어 별생각 없이 틀었다가 그날 밤을 꼬박 샜다. 전체 5회 시리즈를 정주행했다. 중간에 보다가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던 기억이 아직 또렷하다. 아직 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꼭 보기를 바란다. 1986년 4월 26일 01시 23분 45초경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다룬 <HBO 미드 체르노빌>이다.

드라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에 대한 전후 내용을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담았다. 방사능 자체도 물론 공포스럽지만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무력감에 등골이 더 오싹하다. 그래서 어떠한 공포영화보다 무섭다. 

초반부는 폭발사고와 방사선 피폭에 대한 공포감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다. 구식 원자로 자체의 문제와 '괜찮을꺼야'라는 안일한 판단이 맞물리면서 역사상 최악의 인재(人災)가 터졌다. 이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400배. 폭발이 발생하고 나서 방사선 누출량이 3.6뢴트겐(흉부 엑스레이서 나오는 양)밖에 안돼 안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기기 최대값으로 측정됐던 것이었고 실상은 4000배가 넘는 1만5000뢴트겐이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원전 옥상에 사람들이 직접 올라가 흑연 조각을 치우는 장면 가히 압권이다. '지지직, 지지직' 방사능측정기 소리가 얼마나 소름 끼쳤던지. 

반대로 후반부는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 사고를 은폐하려는 이들과 알리고자 하는 이들이 팽팽하게 맞선다. 드라마 주인공이자 실제인물인 레가소프 과학자는 마지막 국가재판에서 이번 사고가 인재와 함께 원자로 자체 결함도 있다고 진실을 밝힌다. 국가가 자신을 입 막으려 했었고 이러한 압박에 한때 거짓보고를 했다고도 시인한다. 1987년 7월 체르노빌 재판장에서 레가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불쾌할 때 우리는 진실의 존재를 잊을 때까지 거짓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존재하죠. 우리의 모든 거짓은 진실에게 빚을 지고, 언젠가 그 빚은 갚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RMBK 원자로심이 폭발한 경위입니다. 거짓 때문이죠." 이듬해 4월 27일 사고 2주년을 앞두고 사고결과가 발표되자 그는 자택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꼬박 26년이 지난 2023년 7월. 레가소프의 발언이 동북아시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드라마를 아직 못 봐서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오늘밤 당장 보시길. 누구 말마따나 오염수를 다핵종제거설비(ALPS)로 처리한다고 순수(純水)가 되지 않는 법이다. 드라마 엔딩씬에서의 레가소프 독백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진실은 숨어서 언제나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한때 나는 진실의 대가가 두려웠으나, 이제 다만 묻는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김동훈 기자 hooni@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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