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영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사)물과 생명 대표
"세종대왕의 과학, 헌법의 철학, 그리고 세계 비의 날 제안"
[이투뉴스] 7월 17일은 제헌절이다. 나라의 뿌리를 세운 날이자, 우리가 어떤 철학 위에 살아가야 하는지를 선언한 날이다. 헌법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헌법을 기념하며 만든 제헌절 노래다. 정인보 작사, 박태준 작곡의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놀랍게도 이 노래는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인간 중심의 문명에서 벗어난 철학적 전통을 담고 있다. 이 구절은 단순한 시적 장치가 아니다. 단군왕검이 우사(雨師), 운사(雲師), 풍백(風伯)을 데리고 나라를 세운 신화, 그리고 세종대왕이 직접 발명한 측우기와 강우 관측제도로 이어지는 수천 년에 걸친 빗물과 자연 중심의 물 철학을 압축한 선언이다.
◇기후위기, 결국은 비·바람·구름의 문제
2025년 지금, 우리는 기후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폭염, 가뭄, 홍수, 산불, 미세먼지까지... 모든 재해는 결국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양, 시기, 순환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바람이 멈추고, 구름이 머물지 못하며, 비가 한 번에 쏟아진다. 기후위기는 곧 ‘하늘의 리듬’이 무너진 현상이다. 제헌절 노래는 이를 이미 경고하고 있었다.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는 마지막 구절은, 단군의 철학과 세종의 과학을 오늘날의 위기 속에서 다시 꺼내야 한다는 다짐으로 읽힌다.
◇‘세계 비의 날’을 제안한다
나는 지금 9월 3일을 ‘세계 비의 날(UN Rain Day)’로 제정하자고 국제사회에 제안하고 있다. 1441년 9월 3일은 세종대왕이 전국에 측우기를 설치하도록 명한 날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공공 강우관측시스템 도입일이다. 그동안 세계는 ‘지구의 날’, ‘물의 날’은 있었지만, 비의 날은 없었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의 물 문제는 이제 ‘하늘에서 내리는 물’, 곧 비의 관찰·기록·관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비는 생명이며, 재난이며, 희망이다.
◇빗물을 통해 헌법 정신을 실현하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그동안 이 문장은 선언적 문구로만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구체적 실천이 가능하다. ‘비의 날’을 제정하고, 빗물의 기록과 관리, 교육과 공유를 통해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다. 이미 캄보디아에서는 Rain School Initiative가 국가 교육과정에 편입되고 있고 비의 날을 제안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인도에서는 ‘Catch the Rain’ 캠페인이 활발하다. 탄자니아, 멕시코, 영국 등에서도 빗물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이 다시 ‘비’로 세계를 이끌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국회와 정부는 행동하라
나는 간절히 요청한다. 9월 3일 ‘세계 비의 날’ 제정을 위한 국가 차원의 유엔 제안 절차를 조속히 시작해야 한다. 세종의 날을 기억하고, 제헌절의 노래를 부른 나라에서, 비를 잊고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저버리는 것이다. 국회의 결의안, 외교부의 제안서, 교육부의 교과과정 개편, 환경부의 물 정책 전환—이 모든 것이 함께 이뤄질 때, 대한민국은 다시금 철학과 실천이 만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제헌절 노래는 미래에 대한 예언
비는 하늘의 자비다. 우리는 그 비를 기록하고, 저장하고, 나누는 문명을 되살려야 한다. 제헌절 노래의 첫 소절은 단지 과거를 노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었고, 지금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다.
한무영 서울대 명예교수, 사단법인 물과 생명 대표 myhan@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