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형 생태환경작가

최원형생태환경작가
최원형생태환경작가

[이투뉴스 칼럼 / 최원형] 지역에 있는 한 전통시장을 활성화시키는 프로젝트에 그 고장 출신 유명인사가 참여하면서 뉴스가 된 적이 있다. 낡은 시설을 쾌적하게 바꾸는 걸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리모델링 과정에서 전통시장의 구성원 가운데 일부의 입장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건물 구조물의 일부 또는 가게에 덧댄 차양 아래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비도 어엿한 전통시장의 입주민이자 구성원인 셈이다. 2021년과 2022년, 2년 동안 공주대학교 재학생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그 시장에 있는 31개 가게에서 제비가 75개의 둥지를 만들어 새끼를 길러냈다고 한다. 가게가 리모델링, 철거, 이전 등의 공사를 하는 과정에 제비 둥지가 상당량 사라졌다. 갑자기 사라진 둥지에 당황스러워하는 제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는데 양가감정이 들었다. 밀려나고 쫓겨난 제비의 모습은 한없이 슬프면서도 그 와중에도 제비들의 처지를 기록으로 남긴 이들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관심이 없다면 제비의 처지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충북 한 지역에서 벼 베기 장면을 봤다. 기계 한 대가 순식간에 벼를 베면서 알곡과 빈 볏짚단을 분리했다. 볏짚단은 비닐로 포장되어 사료가 된다고 한다. 겨울을 지내려 기러기 떼가 북쪽에서 연일 내려오고 있다. 기러기 떼에게 논에 떨어진 낙곡은 중요한 먹이인데 알뜰하게 다 쓸어가 버리는 저런 기술이 내 눈에는 무척이나 야박하게만 느껴졌다. 숱한 생물 종이 멸종위기에 처해있고 그로 인해 생물다양성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앎과 앎을 삶에 녹여내는 일은 다르다. 비행기 동체에 부품을 고정시킬 때 나사 대신 리벳을 사용한다. 리벳은 나사처럼 풀고 조이는 게 불가능한 비가역적 장치다. 창공을 날아야 하는 기계는 무엇보다 안전을 담보해야 하기에 나사 대신 리벳으로 모든 부품을 조립한다. 그러나 이 리벳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헐거워지고 어느 순간 하나씩 빠지고 망가질 수 있어 늘 살펴야 한다. 생물 종의 멸종을 비행기 동체에서 리벳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에 비유하면 어떨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시대가 어쩌면 비행기 날개가 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기 직전은 아닐까 하는 상상은 너무 나간 걸까? 

풍요로움이 정점에 이른 시대, 많을 걸 갖고 누리고 살면서도 누구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한다. 우리만 행복하지 못한 게 아니라 지구에 함께 살아가는 뭇 생명의 안위 역시 불행하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자신의 서식지에서 우리의 식·의·주가 되느라 사라지고 있는지 우리는 감각하지 못한다. 욕망이 이끄는 데로 살다 보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우리 공동의 집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턱 밑까지 절멸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 인류 역시 절멸의 칼날을 빗겨가지 못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중요한 결단이 필요한 시기이다. 지구에 가장 나중에 등장한 우리 인류(인류 가운데서도 상위 10%의 인류)가 지구 환경을 이토록 망가뜨리고 있다는데 깊은 반성이 필요해 보인다. 그 반성은 탄소배출을 몇 톤 줄이느냐, 탄소중립을 이룩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내 주변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존재에 눈뜨는 일이다. 

북아메리카 선주민 가운데 여러 부족의 연합체인 하우데노사우니Haudenosaunee(흔히 이로쿼이Iroquois라고도 함)에 전해져오는 고유한 세계관이 있다. ‘한 그릇에 한 숟가락one bowl one spoon’이라는 개념인데,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은 숟가락을 하나씩 갖고 있기에 지구를 사용할 권리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있다는 비유다. 어느 목숨이든 먹지 않고 살 수 없고 우리 모두를 먹이는 하나의 그릇은 ‘지구’다. 그렇기에 그릇이 텅 비기 전에 채워야 하는데 이게 바로 지속가능성이다. 그렇다면 그릇은 누가 채워야 할까? 오직 내 능력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그릇이 오염되고 망가지는 것에 무관심했던 게 아닐까? 이제 우리 모두의 밥그릇이 비지 않게 하려면 생명의 그물망에 예민해져야 한다. 나는 이 예민함을 생태 감수성이라 부른다. 감수성이 있어야 사물이 보이는 법이고 보이는 게 많을수록 나와 내 주변의 것들과 공존하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

자연은 꾸미거나 소유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진리의 정전이다. 단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없고 나날이 변해가지만 변화의 물결 속에도 나름의 기준이 있고 또 다시 반복되는 리듬을 읽을 수 있는 게 생태감수성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기업 로고를 100개 말할 수는 있어도 식물 이름 10개, 새 이름 10개를 말하기는 어려워한다. 우리가 너나없이 철부지로 사느라 밥그릇이 비어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철이 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 철이 든다는 것은 계절에 따라 내 주변의 변화에 예민해지는 일이다. 달마다 예민하게 주변을 관찰하다 보면 내 주변에 함께 살아가는 생물의 다양함에 놀라고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런 기쁨은 바깥으로 뻗어나가던 욕망의 크기를 줄여준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결국 내 삶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우리 지구가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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