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투뉴스] 장수가 찌그러진 투구를 쓰고 있으면 영(令)이 안 선다. 2038년까지의 장기 전력정책계획을 짜는 11차 전력수급기본기본계획 수립위원회의 처지가 꼭 그렇다. 정부가 이 계획에 대놓고 신규원전을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그럴싸한 명분과 근거를 만드는 궂은일이 위원회 몫이 되었다.

정부가 짠 계획에 서명하고 손만 든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한때 수급위원회 위원은 약력에 한 줄 끼워 넣어도 무게가 실리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번엔 아닌 모양이다. 직을 맡지 않겠다고 고사한 워킹그룹장이나 민간 위촉위원이 여럿이라고 한다. 산업부 공무원들조차 기회가 되면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게 내부소식에 밝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최소 10년 뒤에나 착공할 수 있는 원전을 무리수로 밀어붙였다가, 정권이 두 번 바뀔 시간에 다 다칠 거로 생각하지 않겠어요? 재생에너지가 됐든, 원전이 됐든 제발 적당히 좀 했으면 합니다.” 위원회 잔류 여부를 고민하는 이들의 하소연이다.

정권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에너지정책의 폐해는 적잖다. 에너지전환이나 탄소중립은 언감생심, 기본적인 수급안정과 에너지안보 지표조차 악화일로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한전이 송전망을 확충하고, RE100을 이행해야 할 반도체공장들이 LNG발전소로 전력을 조달해야 할 판이다. 기존 원전도 경부하 때 계획감발로 중단 사태를 피하고 있는데, 원전을 더 늘렸을 때 계통을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건지 답하는 사람은 없다.

글로벌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RE100 무역규제를 정부 주도 CF100으로 돌파하겠다는 아이디어는 누가 냈을까. 반드시 정책 실명제를 적용해 유효하다면 훗날 큰 상을 주고, 아니라면 크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직언하는 사람은 없고, 적당히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는 관료들이 위정자 주위에 포진해 있다. 이런 혼란을 틈타 기업들은 실체도 불분명한 수소에 부나방처럼 뛰어들고 있다. 콩(재생에너지)도 없는데, 메주틀만 들고 부산을 떤다. 메주 쑤는 법은 알고 있을까. 혹자는 수소를 '에너지분야 비트코인'이라고 한다. 

재생에너지 구호만 외치고 전기요금 현실화와 전력망 보강은 등한시한 전 정부나 자유시장경제를 부르짖으며 되레 관치를 강화하고 원전에만 목을 매는 현 정부나 기대난이긴 마찬가지다. 죄 없는 국민만 고통을 감내해야 겠지만, 너무 늦지 않게 터지고 깨지고 무너져야 정신을 차릴거란 냉소가 확산되고 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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